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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떨어져도 간다”…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누비는 종군기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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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연민과 윤리, 정의의 가치를 향한 브렌트의 전문성과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브렌트의 삶과 희생이 전 세계의 모든 세대가 빛의 힘에 서서 어둠의 힘에 맞서 싸우도록 영감을 주기를 기원합니다.”  

2015년 피바디상 시상식에 참석한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브렌트 르노. 지난 13일 우크라이나 난민을 취재하던 중 러시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AP=연합뉴스

2015년 피바디상 시상식에 참석한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브렌트 르노. 지난 13일 우크라이나 난민을 취재하던 중 러시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AP=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공개한 편지다. 우크라이나에서 취재하던 중 숨진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브렌트 르노(51)의 유족에게 쓴 내용으로,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을 담았다. 르노는 지난 13일 타임지와 함께 진행하던 글로벌 난민 위기 프로젝트를 위해 키이우 인근 소도시 이르핀에서 난민을 취재하던 중 러시아군이 쏜 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미국 방송협회 피바디상을 두 번 받은 실력파 감독이다. 지난 10여년간 동생과 함께 웹사이트 ‘르노 브라더스 닷컴’을 운영하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 전장을 누볐고, 아이티 지진과 아프리카 극단주의, 중미의 청소년 난민 문제 등 분쟁 지역에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바깥세상에 알렸다. 뉴욕타임스(NYT)와 NBC 등 주요 언론사와도 일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르노와 함께 취재하다 다친 동료 사진기자 후안 아레돈도(45) 역시 세계보도사진상을 받은 권위자다.

스필버그도 탐냈던 종군 스토리 

미국 뉴욕타임스의 사진기자 린지 아다리오. 2015년 회고록을 바탕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제작을 추진했지만 불발됐다. [유튜브 캡처]

미국 뉴욕타임스의 사진기자 린지 아다리오. 2015년 회고록을 바탕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제작을 추진했지만 불발됐다. [유튜브 캡처]

미국 국적 언론인의 사망에도 우크라이나 곳곳에는 여전히 목숨을 걸고 현장을 누비는 기자들이 있다. 르노가 목숨을 잃은 도시 이크라에선 며칠 전 일가족 3명과 동행하던 남성 1명도 박격포탄에 맞아 숨졌다. 캐리어 가방 등에 뒤섞여 처참하게 널브러진 이들의 모습은 지난 7일 뉴욕타임스 1면에 공개됐다. 이 장면을 포착한 사진기자가 퓰리처상 수상자인 린지 아다리오(49)다.

아다리오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콩고, 아이티 등 분쟁 지역을 두루 취재한 미국의 베테랑 종군기자다. 수년간 시리아 난민의 삶을 추적하는 등 인권, 젠더 문제에 천착한 그는 2011년 리비아에서 납치됐다가 5일 만에 석방됐었다. 2015년 출간한 회고록을 기반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제작을 추진했지만 불발됐다. 2006년 가자지구에서 납치됐다 풀려났던 AP통신의 에밀리오 모레나티 역시 우크라를 누비는 퓰리처상과 세계보도사진상을 받은 베테랑 사진기자다.

미 폭스뉴스도 14일 국무부 출입 기자인 벤저민 홀(40)의 부상 소식을 발표했다. 키이우 외곽 지역에서 취재하다 양쪽 다리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과 미국 이중 국적자인 홀은 리비아의 미스라타에 잠입해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민간인 무차별 포격 사건을 보도하는 등 이집트와 아이티, 이란, 소말리아 등 험지 취재를 자처했다. NYT와 AFP통신, BBC 등을 거쳐 중동 전문기자로 입지를 다지며 2015년 『ISIS의 내부』를 출간했다.

폭탄 터지고, 수류탄 옆에 있어도 방송   

CNN 선임 국제특파원 매튜 찬스. 지난달 키이우의 한 옥상에서 생방송 중 폭발음에 깜짝 놀라 안전모와 방탄조끼를 챙겨 입는 모습. [유튜브 캡처]

CNN 선임 국제특파원 매튜 찬스. 지난달 키이우의 한 옥상에서 생방송 중 폭발음에 깜짝 놀라 안전모와 방탄조끼를 챙겨 입는 모습. [유튜브 캡처]

CNN 선임 국제특파원 매튜 찬스(52)는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를 가장 초기에 생생하게 알린 기자로 꼽힌다. 지난달 키이우의 한 옥상에서 생방송 중 폭발음에 깜짝 놀라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타면서 유명세를 치렀다. 찬스는 2001년 아프간 전쟁 당시 걸어서 카불에 도착한 최초의 서방 기자 중 한 명으로 베테랑 종군 기자다. 2008년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할 때도 현장을 지켰던 그는 2011년 리비아의 카다피 측에 인질로 붙잡히기도 했다.

찬스는 지난달 24일 생방송 중 등 뒤에서 폭발음이 울리자 “폭발음이 4번, 5번 정도 들렸다. 침공이 시작된 것일 수 있다”면서도 방탄조끼를 꺼내 입고 침착하게 방송을 진행했다. 5일 뒤엔 방송 중 자신이 무릎을 댄 바닥 바로 옆에 수류탄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일단 여기서 벗어나시죠”라면서 방송을 이어갔다. 지난 1일엔 벙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도 성사시켰다. “당신이 더 일찍 행동하지 않아서 우크라이나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압박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14일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휴가 소식을 알렸다. 지난 1월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지 두 달여 만이다. 찬스는 15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키이우에서 폴란드 국경까지 힘겨웠던 14시간의 여정을 밝힌 뒤 “국경을 넘자마자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조만간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이 전쟁이 결코 끝날 것 같진 않거든요.”

어린 두 아들 두고 전쟁터 가는 엄마    

CNN의 수석 국제특파원 클라리사 워드가 우크라이나 현지 생방송 중 난민을 돕고 있다. [유튜브 캡처]

CNN의 수석 국제특파원 클라리사 워드가 우크라이나 현지 생방송 중 난민을 돕고 있다. [유튜브 캡처]

지난해 탈레반을 인터뷰했던 CNN 수석 국제특파원 클라리사 워드(42)도 전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생방송 도중 폭격에 폐허가 된 길을 힘겹게 오르는 노인과 여성을 부축하면서 방송을 이어갔다. 그는 방송에서 “사람들은 너무 피곤해서 거의 걸을 수도 없고, 너무나 끔찍한 장면”이라면서도 “그래도 (살아남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병원에서 다친 어린이와 민간인의 모습을 보도하며 인도적 관심을 촉구한 것도 그였다.

워드는 2012년 시리아 내전 보도로 피바디상을 받았고, 에미상만 9번 수상한 스타 종군 기자다. 2016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자로 나서 내전으로 황폐해진 시리아의 알레포의 참상을 증언했다. 지난 2020년 미얀마 입국 허가를 받은 유일한 외신 기자로 군부의 만행을 보도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강타한 인도의 병원에 들어가 코로나19의 참상을 알렸다. 지난해엔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직접 인터뷰한 ‘강심장’ 기자로 한국에도 이름을 알렸다.

15년 넘게 분쟁 지역을 지키면서 얻은 명성만큼 그가 치르는 대가는 크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는 15일 AP에 “오늘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아들의 4번째 생일”이라며 “아이들과 영상통화를 하는 동안 공습 사이렌이나 폭발음이 주거니 받거니 울린다”고 했다. “지금 힘들지 않은 척은 안 해요. 하지만 당장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지는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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