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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조차 위기 오자 부활시킨 '왕의 칼'...그런 '왕수석' 없애는 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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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정(司正)을 하다 사정의 대상이 돼왔던 ‘민정수석 잔혹사’가 과연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4일 민정수석실 폐지를 선언했다. 윤 당선인은 이날 안철수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등과 함께 한 차담회에서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에서 사정·정보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윤 당선인은 과거 청와대의 하명 수사를 담당했던 ‘사직동팀’을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과거 사정 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과 정치적 반대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며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신상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2019년 7월 25일 윤석열 당시 신임 검찰총장이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해 당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 7월 25일 윤석열 당시 신임 검찰총장이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해 당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정희 정부 때인 1968년 신설돼 폐지와 부활을 반복해 온 민정수석실의 완전한 청산을 선언한 것이다.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민정수석실 폐지는 인수위 논의과정의 가장 역점을 두는 정치개혁 아젠다가 될 것”이라고 했다.

‘민정(民情)’이란 ‘백성의 마음을 살핀다’는 뜻으로 국민을 섬긴다는데에서 어원이 비롯됐다. 하지만 실제 민정수석실은 그렇게 운영돼오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사정 기관을 총괄하며 인사 검증까지 맡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오명 아닌 오명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감원 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인 집무실에서 티타임을 갖고 있다. 윤 당선인은 이 자리에서 민정수석실 폐지 의사를 밝혔다.국회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감원 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인 집무실에서 티타임을 갖고 있다. 윤 당선인은 이 자리에서 민정수석실 폐지 의사를 밝혔다.국회사진기자단

민정수석실의 권력은 역대 민정수석의 면면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박근혜 정부에선 우병우 전 부천지청장이, 노무현 정부에선 문재인 대통령이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모두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최측근 인사였다. 다른 정부에서도 그 상징성이 조금 덜했을 뿐 ‘대통령의 사람’이 민정수석을 맡는 것엔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의 친·인척을 관리하고 비위를 검증하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축소됐다.

민정수석실은 권력의 중추였다. 민정수석실 폐지를 선언했던 김대중 정부는 ‘옷로비 사건’등 위기가 닥치자 민정수석실을 부활시켰다. 무너진 권력을 다시 세우는 것도 민정수석실의 역할이었다. 문재인 정부 대검 검찰개혁위원을 지낸 김종민 변호사는 “민정수석은 제왕적 대통령을 떠받치는 핵심 도구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2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역대 정부의 불행은 대부분 민정수석의 몰락과 함께했다. 권력이 몰리는 곳엔 어김없이 부패가 자라났다. 민정수석을 두고 ‘독을 든 성배’란 말도 나오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신광옥 전 수석이, 노무현 정부에선 박정규 전 수석이 뇌물혐의로 구속됐다. 이명박 정부에선 무혐의를 받았지만, 이종찬 전 수석이 검찰 수사를 받았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우 전 수석과 문재인 정부의 조 전 수석의 경우 모두 윤 당선인이 직접 수사를 지휘해 기소한 전직 민정수석들이다.

우 전 수석은 국가정보원을 활용해 불법 사찰(징역 1년)을 하고 국정농단을 방조(무죄)했단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조 전 수석은 친문 인사들의 로비를 받아 유재수 전 금융위원회 국장의 비위 혐의를 눈감아 준 혐의로 불구속기소 돼 재판을 받고 있다.

윤 당선인이 민정수석실 폐지를 선언한 건 검찰 재직 시절 수사를 통해 이런 폐해를 보고 또 직접 경험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런 수사를 했던 이른바 ‘윤석열 라인’의 검사들을 승진시키고, 좌천시킨 것 역시 민정수석실이었다. 조 전 수석 수사에 관여했던 현직 검사는 “민정수석실은 정치의 검찰 수사 개입의 원천과 같은 곳”이라 말했다.

지난해 12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자녀 입시비리'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자녀 입시비리'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민정수석실의 폐지는 끝이 아닌 시작이란 말이 나온다. 민정수석실을 폐지한다 해도 ,공직을 감찰하고 인사를 검증할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름만 다른 또 다른 민정수석실이 등장해 권력을 휘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벌써부터 견제없는 검찰의 탄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대중 정부 초기 민정수석실을 대체해 만든 초대 법무비서관을 역임한 박주선 전 의원은 “당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민정수석의 역할과 기능은 사실 그대로 유지됐었다”고 회고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통령의 정책은 매번 의도하지 않는 효과를 낳기 마련”이라며 “민정수석실을 폐지해 생긴 권력의 공백을 또 다른 권력기관이 대체하진 않을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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