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시작된 에너지 전쟁

중앙일보

입력 2022.03.15 00:25

업데이트 2022.03.1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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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전 세계의 반대에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2~3일 만에 끝나리라던 전쟁은 러시아의 기대와 달리 20일이 지났다. 푸틴 대통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전황이 러시아의 뜻대로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푸틴의 두 가지 오판에 기인한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전력과 국민의 저항을 얕잡아 봤다. 세계 2위의 러시아군이 가는 곳마다 우크라이나의 방어막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우크라이나 국민은 똘똘 뭉쳐 거세게 저항했다. 러시아군의 진격은 곳곳에서 막혔다. 이런 오판의 근거는 잘못된 정보였다. 러시아 정보기관은 전쟁을 원하는 푸틴의 입맛에 맞게 왜곡된 정보를 보고했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러-우크라 전쟁 여파 유가 급등
에너지의 92.8% 수입 한국 타격
미·EU “경제 위해 에너지 자립”
한국도 ‘자립’ 향한 큰 틀 세워야

또 푸틴은 유럽의 반발을 가벼이 여겼다. 미국의 제재는 그렇다 치고 유럽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할 때처럼 ‘미지근한’ 대응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푸틴이 이렇게 판단한 건 러시아에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에너지다. 유럽연합(EU)은 천연가스의 40%, 원유의 25%를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에너지에 관한 한 러시아가 EU의 목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EU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와 함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폭적인 원조 계획을 발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의 휘발유 판매 가격도 8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14일 서울 강남구의 한 주유소에 휘발유 가격이 2000원대를 나타내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의 휘발유 판매 가격도 8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14일 서울 강남구의 한 주유소에 휘발유 가격이 2000원대를 나타내고 있다. [연합뉴스]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값 급등이라는 쓰나미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전쟁 전 배럴당 70~80달러 수준이었던 국제 유가는 다락같이 올라 140달러에 육박한다. 전문가는 상황이 더 나빠질 경우 배럴당 200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내다보기도 한다.

한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 아니라 바람 앞의 등불처럼 속수무책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38선을 두고 북한과 나뉜 한국은 어디서도 전기를 빌릴 수 없는 ‘에너지 섬나라’다. 한국 같은 나라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게 필수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국 경제에 1차 오일쇼크(1973~74년), 2차 오일쇼크(79~80년) 못지않은 충격을 줄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한국은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에너지 자립도가 오히려 낮아졌다. 2차 오일쇼크 직후엔 석탄 덕에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75%였다. 수십 년이 지난 요즘, 에너지의 92.8%(2020년)를 수입에 의존한다. 에너지 생산국이 기침만 해도 한국은 독감에 걸리게 돼 있는 형국이다.

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은 경제규모(2021년 명목 국내총생산 기준)가 세계 10위다. 이번에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11위)보다도 크다. 규모 면에선 경제 대국 반열에 올랐지만 에너지에 관한 한 약소국이다. 에너지 안정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한국은 항상 주변국 눈치를 보며 겁먹은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전쟁이 난 지 겨우 20일 지났지만 벌써 한국경제는 흔들릴 조짐을 보인다.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10일 무역수지가 13억9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수출 증가(14.9%)보다 수입 증가(15.3%)가 더 많은 탓이다. 에너지값 급등 여파로 이 기간 원유(43.6%)뿐만 아니라 가스(87.0%), 석유제품(46.3%) 수입액이 크게 늘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선 에너지 전쟁이 시작됐다. 서방 국가는 러시아 제재에 나서면서 앞다퉈 에너지 자립을 외치고 있다. EU 27개 회원국은 지난 10~11일 파리에서 정상회의를 하고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여 2027년까지 독립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가스·석유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재생에너지 개발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이에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일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금지를 발표하며 에너지 자립을 강조했다. 그는 “이번 위기는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에너지 자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고 했다. 미국은 대부분의 에너지를 자체 조달할 수 있어 에너지 자립을 이룬 국가로 평가받는다. 그런 미국도 ‘경제 보호’를 내세우며 에너지 자립을 외친다.

에너지의 92.8%를 해외에 의존하는 한국은 어떤가. 지난 5년간 탈원전·탄소중립 정책 등을 내세우며 단가가 비싼 천연가스 발전 비중이 높아져 에너지 비용이 크게 늘었고 에너지 공급에 대한 불안감도 커졌다. 이제는 에너지 자립이라는 큰 틀에서 화석연료, 원전, 재생에너지에 대한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전력수급 기본계획을 비롯한 에너지 정책을 다시 수립해야 한다. 에너지 자립 없이는 세계 10위 경제 대국도 모래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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