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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단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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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육당 최남선은 1955년 자유신문에 발표한 시 ‘감우(甘雨)’에서 ‘이 비의 한 방울이 한 알 곡식 될가하매/ 우리들 벌써부터 배부르지 아니한가/ 울가망 어제까지 일 꿈이런가 하노라’고 노래했다. 감우는 순우리말로 ‘단비’다. 농경사회에서는 ‘가물에 단비’가 생사를 가르는 고마운 존재다. 이제 우리나라 농업 인구는 230여만 명에 그치지만 여전히 단비를 기다리는 이는 많다.

 강릉·동해·삼척·울진 등 광범위한 지역을 휩쓴 동해안 산불이 12일부터 내린 단비 덕분에 마침표를 찍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13일 오전 동해안 산불 지역 ‘재난 사태’를 해제했다. 이번 동해안 산불은 관련 기록이 있는 1986년 이후 가장 피해 면적이 넓다. 추정 피해 면적이 무려 2만4840ha. 서울 면적의 10분의 4에 이른다. 이전까지 최악의 산불로 남아있던 2000년 4월 7일 발생한 동해안 산불의 피해 규모 2만3794ha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동해안 산불은 한반도에선 꾸준히 반복된 재해다. 관련 연구(김동현 외, 2011)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조선 시대 역사서에 기록된 산불 63건 중 동해안 권역에서 발생한 산불이 38건으로 약 60%를 차지한다. 순조 4년(1804)에 발생한 동해안 산불이 가장 규모가 컸다. 민가 2600호와 사찰 6곳이 소실됐고 사망자는 61명에 달했다. 인명 피해로만 봤을 때 가장 심각했던 건 사망자 65명을 기록한 현종 13년(1672) 동해안 산불이다. 낙산사 관음전이 피해를 보았던 성종 20년(1489)의 산불은 낙산사 동종을 완전히 녹여버린 2005년 산불의 기억과 겹친다.

 이번 산불은 2000년 동해안 산불과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2000년에도 오랜 겨울 가뭄 끝에 불이 났고, 일주일 넘게 이어지다가 단비가 내리면서 잡혔다. 당시 산불 기간엔 제16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고, 이번 동해안 산불은 제20대 대선과 나란히 갔다. 고 김대중 대통령 재임 중 벌어졌던 16대 총선에선 제1야당이었던 한나라당(‘국민의 힘’의 전신)이 133석으로 제1당을 차지해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다. 20대 대선 결과,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집권당이 바뀐 여소야대 정국이 이어질 예정이다.

 달라진 건 인명피해다. 2000년 산불엔 사망자 2명에 부상자가 15명이었으나 이번 산불에선 아직 인명 피해가 확인된 바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고쳐나간 덕분일 것이다. 사투를 벌인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