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나영의 일리(1·2)있는 선택

여가부 폐지? 여성 이해하는 척도 안하는 尹, 어떻게 뽑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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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권나영 20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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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새 기획 칼럼 시리즈 '나는 고발한다. J'Accuse...!'가 대선 이후 드러난 다양한 표심읽기에 도움이 되는 '나는 고발한다 번외편-일리(1·2) 있는 선택'을 14일부터 일주일 동안 매일 연재합니다.
1번이든 2번이든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무지하다고 비판하거나 악마화하는 대신 그 선택의 이유를 들어보며 상대에 대한 이해를 높여보자는 취지입니다. 15일은 20대 여성의 속내를 쓴 권나영씨와 비슷한 또래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인 김잔디(가명)씨가 1번을 찍을 수 없었던 이유를 쓴 글이 나갑니다. 더 많은 관련 칼럼은 중앙일보 사이트 나는 고발한다 섹션(www.joongang.co.kr/series/11534)에서 볼 수 있습니다.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한 박지현(오른쪽)씨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캠프 합류는 이대녀 결집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픽=김현서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한 박지현(오른쪽)씨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캠프 합류는 이대녀 결집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픽=김현서

나는 서울에 사는 26세 여성, 대학원생이자 사회초년생이다. “통일되면 치안이 더 불안해질까 두렵다”라는 말에 “그 정도라고?”라고 되물으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던 남자 동기들의 반응을 보면서 꽤 오래전부터 남녀 사이가 무언가 단절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졌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페미니즘을 접한 후 세상의 다른 면이 보였고, 여성정책을 나의 정치적 선택의 최우선으로 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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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은 평소 정치에 큰 관심이 없다. 사는 게 힘들어서 관심 갖기 어렵다는 게 더 정확한 마음일 것이다. 정치 뉴스를 챙겨볼 시간은 물론 심적 여유도 없다. 당장 일과 공부를 하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걸 알면서 굳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정 소모라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하여 대선같이 큰 선거를 앞두고서야 갑작스레 관심을 기울여 최대한 합리적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어린 세대의 변명 같아 보일지 몰라도, 이게 현재 나와 내 친구들이 사는 방식이다.

내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 오로지 대선 기간 동안 그의 행보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페미니스트 신지예 한국여성정치 네트워크 대표를 영입했지만, 이대남의 지지를 받는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 끝에 사퇴했다. [뉴스1]

지난해 12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페미니스트 신지예 한국여성정치 네트워크 대표를 영입했지만, 이대남의 지지를 받는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 끝에 사퇴했다. [뉴스1]

껍데기라도 지지한다 

잠깐, 표를 얻기 위해 대선 때만 빛나는 공약을 앞세우고 듣기 좋은 발언을 하면 된다는 말이냐고? 선거 유세 기간에는 지지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공약이 모두 지켜질 거라 믿지도 않는다. 솔직히 정치 효용감을 느껴본 기억도 없다. 자칭 페미니스트 정부였지만 온갖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문재인 정부를 이미 겪은 탓이다. 그러니까, 나는 껍데기인 줄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투표했다. 그 껍데기라도 보고 싶었으니까.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이번 대선에서 윤 후보는 절대 뽑을 수 없었다. 정치인은 나를 대표하는 사람인데 그는 내가 처한 상황을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심지어 이해하는 척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 후보는 대선 기간 중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7글자를 SNS에 올리고 “구조적 성차별은 없으며,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고 말했다. 이는 여성인권 향상이라는 담론 자체의 소멸을 바라는 소위 이대남의 열렬한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과 처벌을 목도하며 사는 나는 이런 시각을 납득할 수 없었다. 여가부의 존재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약자라는 걸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노인부, 아동부가 필요하다면 그걸 새로 설치하면 될 일이지, 왜 굳이 여가부 폐지를 중심 공약으로 내세운 걸까? 여성 의제를 다루는 걸 피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세계경제포럼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GGI)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56개국 가운데 102위로 꼴찌 수준이다. 이 같은 현실은 부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여성이 투표하고 직장만 가지면 성차별이 없는 것인가? 동료 남성 시민과의 차이가 존재하는 게 문제다. 이러한 차이와 해결 방안은 개인적 범위를 넘어선다. 내가 으슥한 길거리에서 느끼는 공포는 나 혼자 씩씩해지려고 노력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골목길에서 오로지 내 성별만 보고 다가와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자랑스럽게 보여준 남성의 당당함은 내가 노력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정치권이 빚은 이대남들과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내가 힘들다는데,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과는 친구 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윤 후보는 반(反)여성주의 전략으로 이대남과 동화되었고, 그들의 우상이 되었다. 결국 나는 구조적 성차별에 대한 그의 왜곡된 인식과, 여성인권 신장 운동인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과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윤 후보의 캠페인에 분노해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변화는 고사하고 나의 현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나를 대표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또 “취준생 짐을 덜어주기 위한 혁신적인 방법이 구직앱”이라고 말할 정도로 청년 취업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모습에도 소외감을 느껴 뽑을 수 없었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2022년 세계여성의날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이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SNS에 다시 한 번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올렸다. [연합뉴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2022년 세계여성의날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이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SNS에 다시 한 번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올렸다. [연합뉴스]

박지현에 빚진 마음 

그렇다면 마음 편하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지지했을까? 그렇지 않다.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눈에 띄는 흠이 많다. 데이트 폭력 살해범(강동구 모녀 살인사건)을 심신미약으로 변호한 점, 배우 김부선씨와의 불륜 의혹, 그리고 여성비하 욕설 논란 등 뉴스를 들을 때마다 다 거기서 거기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 진지하게 살펴볼 여력이 없기에 캠페인 기간 동안이라도 나를 생각해주는 척이라도 하는 후보에게 표를 줬다. 이 후보 캠프에 N번방을 세상에 알린 박지현 불꽃 추적단이 포함된 게 단적인 예였다. 나는 불꽃을 응원하고 싶었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 후보가 고마웠다. 박지현은 일상 속 성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시화하고 대책을 요구한 최초의 동년배다. 나는 그에게 빚지고 있다고 느낀다.

사전투표를 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수업을 듣고 나오는 길에 출구 조사 결과를 듣고 결국 그렇게 됐구나, 싶었다. 윤석열 당선인의 미래가 궁금하기도 했고 궁금하지 않기도 했다. 만약 내가 선택한 후보가 당선됐어도 아마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누가 당선됐든 당분간 부담스러운 정치 뉴스를 클릭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짧은 불평 외에는 여전히 친구들과 정치 대화를 삼갈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투표하지 않은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날마다 접하는 정치뉴스는 피곤해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날에는 시간을 들여 투표장에 간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심지어 내가 표를 준 정치인을 믿지 않아도 투표를 했으니, 그 표는 오히려 더 의미심장하다. ‘여기 나도 있다’라는 외침이니까. 내 삶도, 공동체의 미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기에 애써 관심 끄고 살지만, 그래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존중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