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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냥이 집사로 15년, 불타는 시대의 지식인으로 95년 [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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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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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평전 
리처드 J 에번스 지음
박원용‧이재만 옮김
책과 함께

에릭 홉스봄(1917~2012)은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다. 한국에서도 많이 읽힌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75), 『제국의 시대』(87), 『극단의 시대』(94)로 이뤄진 4부작 '시대' 시리즈 외에도 수많은 책과 논문을 남겼다.

 홉스봄은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었다. 가난과 빈부 격차, 불평등에 시달리는 브라질과 인도에선 그의 저서가 정치·사회적 미래를 구상하는 시대의 나침반이자 아젠다의 원천이었다. 2003~2011년 브라질 대통령을 지내고 오는 10월 대선에 다시 출마해 정권교체를 노리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는 홉스봄이 자신에 끼친 영향을 인정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2012년 95세로 세상을 떠난 홈스봄의 '전기적 회고록' 집필을 영국 학술원 현대사 분과에서 제안받아 이 책을 썼다. 홉스봄이 살던 집에서 방대한 자료를 입수한 것은 물론 영국과 유럽·미국의 숱한 문서고와 도서관, 그리고 가족과 친척을 찾아다니며 기록과 증언을 수집했다. 그야말로 발로 쓴 한 인간의 역사다.

에릭 홉스봄. 1971년 무렵의 모습이다. [사진 책과함께]

에릭 홉스봄. 1971년 무렵의 모습이다. [사진 책과함께]

 홉스봄의 시대는 불타고 있었다. 그 불꽃이 역사학자를 단련했다. 삶의 경로를 보면 그 자신이 역사였다. 우연하게도 러시아혁명이 발발한 1917년 태어나 대공황과 나치 집권, 스페인 내전을 목격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으로 복무했다. 전후에는 냉전과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따른 유럽 공산주의의 위기, 쿠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혁명, 유럽공산주의의 대두, 80년대 영국 노동당의 정치적 논쟁 등을 겪었다. 역사 속에 스며든 홉스봄의 삶과 함께 개인의 인생 여정 속에 깃든 역사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이유다.

 홉스봄의 삶은 흔히 '지적으로 왕성하고 정치적으로 적극적'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지적인 활동은 영감과 통찰력, 그리고 균형감을 갖춘 저작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정치적 신념이다. 31년 베를린에서 중등학교에 다닐 때 사회주의자 학생 동맹에 가입한 그는 36년 영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홉스봄은 당을 지켰다. 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으로 수많은 지식인이 떠났지만, 홉스봄은 탈당 대신 당에 남아 비판자로 활동했다. 91년 소련이 무너지고 수많은 자칭·타칭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손절매할 때도 "마르크스주의는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서로 다르다"며 "소련이 보여준 건 마르크스주의의 일탈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비판을 통해 문제를 찾아 수리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피터 데 프란차의 그림.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1955년의 에릭 홉스봄. [사진 책과함께]

피터 데 프란차의 그림.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1955년의 에릭 홉스봄. [사진 책과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적 경제 운용은 생산능력이 한계에 이르러서가 아니고 이로 인한 빈부 격차와 불평등 등 사회적 갈등 때문에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21세기 들어 더욱 주목받는다.

 지은이는 2002년 출간한 자서전 『흥미로운 시대』(한국에선 2007년 『미완의 시대』로 출간)에 실린 “사회주의는 끊임없는 패배와 깊은 실망의 연속-그리고 언젠가는 찾아올 승리야”라는 홉스봄의 말을 인용한다.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하기 전인 36년 내전 중인 스페인을 찾았을 때 한 이 말에는 청년 홉스봄이 평생 지켰던 믿음이 집약됐다.

에릭 홉스봄과 티롤리아. [사진 책과함께]

에릭 홉스봄과 티롤리아. [사진 책과함께]

 10대 때 겪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이은 별세와 가난, 연애, 이혼과 재혼 등 은밀한 가족사와 개인사는 상당수가 처음 공개된다. 삶의 여정 자체가 그의 역사서와 비평서만큼 흥미진진하다. 홉스봄을 증오가 아닌 친절·관대·신의의 인물로 평가하고, 그를 역사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도 존경하게 됐다는 지은이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홉스봄이라는 성이 독일어 또는 동유럽 유대인의 이디시어로 과일나무를 뜻하는 '옵스트바움'을 1870년대 영국 출입국 직원이 잘못 적으면서 나왔다는 이야기, 길고양이 티를리아에 선택받아 15년을 함께 지낸 일화도 흥미롭다.

원제: Eric Hobsbawm: A Life i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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