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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빨간 정육점 조명…또 침대 없는 그 매장이 일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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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외진 골목. ‘그로서리 스토어’(GROCERY STORE·식료품점)라는 커다란 간판이 달린 3층짜리 건물이 눈길을 끈다. 미용실과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에 식료품점이라니…. 의아한 생각에 들어가 보면 안은 별세계다. 정육점을 연상시키는 붉은 조명 아래 햄 모양 수세미와 샌드위치 무늬 메모지부터 농구공과 팝콘, 재떨이와 양말 등 없는 게 없는 잡화점이다.

이곳은 침대 브랜드 시몬스가 지난 2월 문을 연 공간이다. 침대 브랜드지만 침대에 관한 콘텐트는 전혀 없어 색다른 공간이다. 1층에는 식료품점 콘셉트의 상품(굿즈)을 팔고, 2층에는 햄버거 매장, 3층에는 전시 공간이 있다. 앞으로 약 1년간 운영될 예정이다.

지난달 문을 연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 침대와는 상관 없는 기념품(굿즈)를 팔고, 햄버거숍과 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있다. [사진 시몬스 침대]

지난달 문을 연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 침대와는 상관 없는 기념품(굿즈)를 팔고, 햄버거숍과 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있다. [사진 시몬스 침대]

광고판 효과 노리는 오프라인 매장

트렌드 전문가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책 『더 현대 서울 인사이트』에서 최근 고객 경험을 강조하는 상업 공간이 늘고 있다고 했다. 상업 공간의 꽃으로 불리는 백화점에서도 매출을 담당하지 않는 집객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며 이를 두고 소비자들의 욕망과 정체성을 실현하는 ‘페르소나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최근 오프라인 소매 업계에서 판매하지 않는 공간이 느는 추세다. 공간이 곧 매출이라는 소매업계의 공식을 깨는 시도다. 오프라인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광고판이 되는 ‘빌보드 효과’(billboard effect) 때문이다. 매장을 방문하면서 브랜드 인지도를 늘리고, 경험하고 즐기면서 호감도를 높이는 전략이다.

시몬스는 이런 오프라인 공간 전략을 잘 구사하는 브랜드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2018년 경기도 이천에 ‘시몬스 테라스’라는 복합문화공간을 열어 운영하고 있는가 하면, 2020년에는 서울 성수동에 철물점 콘셉트의 팝업(임시) 매장을 열어 줄 서는 가게로 명성을 얻었다. 청담동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 역시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젊은 세대들이 몰려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는 ‘인증샷’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하루 평균 500여명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모두 침대는 팔지 않는 공간이다.

 지난달 문을 연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에는 하루 평균 500여명이 방문한다. [사진 시몬스 침대]

지난달 문을 연 시몬스 그로서리 스토어에는 하루 평균 500여명이 방문한다. [사진 시몬스 침대]

김성준 시몬스 침대 브랜드전략기획부문 상무는 “혼수 위주로 돌아가는 침대 시장에서 소비자가 침대를 소비하는 주기는 길다”며 “침대를 사지 않아도 들러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이를 통해 ‘팬덤’을 만들고자 한다”고 공간 운영의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본업과 상관없어 더 재미있다

시몬스만이 아니다. 식품 브랜드 오뚜기는서울 논현동에 ‘롤리폴리 꼬또’라는 퓨전 음식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오뚜기 라면이나 카레로 만든 음식을 내면서 갤러리처럼 곳곳에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두고 둘러보며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진라면 공책이나 마스킹 테이프 등 문구류 굿즈도 판매한다.

오뚜기가 운영하는 롤리폴리 꼬또도 브랜드 경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진 롤리폴리 꼬또 공식 인스타그램]

오뚜기가 운영하는 롤리폴리 꼬또도 브랜드 경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진 롤리폴리 꼬또 공식 인스타그램]

현대자동차는 다양한 예술과 문화를 아울러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 ‘현대 모터스튜디오’를 서울과 부산·고양시·하남시 등지에서 운영하고 있다. 특히, 디자인 테마로 운영되는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서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디자인을 조명하는 전시를 볼 수 있고, 카페와 레스토랑에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지난해 4월 개관한 현대모터스튜디오 부산 전경. [사진 현대차 제공]

지난해 4월 개관한 현대모터스튜디오 부산 전경. [사진 현대차 제공]

서울 북촌에 ‘설화수의 집’이라는 판매 겸 전시 공간을 낸 설화수도 있다. 제품을 판매하는 공간보다 전시하는 공간 위주로 구성되어 마치 갤러리처럼 브랜드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1960년대의 양옥을 개조해 공간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각별하다.

브랜드에 대해 자세히 설명 하기 보다, 제품이 놓인 공간 자체로 소통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사진은 북촌에 위치한 설화수의 집. [사진 아모레퍼시픽]

브랜드에 대해 자세히 설명 하기 보다, 제품이 놓인 공간 자체로 소통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사진은 북촌에 위치한 설화수의 집. [사진 아모레퍼시픽]

식음료 매장을 내는 패션 브랜드들도 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구찌는 이달 중으로 서울 한남동 구찌 가옥 매장 내에 레스토랑 ‘오스테리아’의 문을 열 예정이다. 현재 가오픈 중으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계 브랜드 브라이틀링도 지난달 3일 서울 한남동에 타운 하우스 콘셉트의 공간을 열고 카페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본업과 상관없는 브랜딩 공간에 소비자들의 호응도는 높은 편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비대면 시대에 소비자들은 오히려 오프라인 경험에 목말라 한다”며 “직접 만져보고 경험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아이 쇼핑(구매하지 않고 즐김)’은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비행기 겹낙고를 연상시키는 내부 디자인이 인상적인 브라이틀링 레스토랑. [사진 브라이틀링]

비행기 겹낙고를 연상시키는 내부 디자인이 인상적인 브라이틀링 레스토랑. [사진 브라이틀링]

“단순 전시보단 뭐라도 팔아야”

다만 최근 이런 판매 목적이 아닌 브랜딩 공간이 늘어나면서 ‘옥석 가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브랜드 본질과 상관없이 단순한 체험 공간만으로 설계할 경우 들인 비용 대비 효과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브랜딩 전문가 최원석 필라멘트앤코 대표는 “요즘 너도나도 브랜드 체험 매장 열다 보니 세트장처럼 단기간 소모되면서 희소성이 떨어지고 소비자 반응이 생각보다 냉랭한 경우도 많다”며 “공간을 통해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본질적 차원에서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성준 시몬스 상무도 “실제 지갑을 여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전시나 체험만으로는 브랜드 경험은 한계가 있다”며 “작은 물건이라도 사거나, 먹고 마시는 행위가 일어나야 브랜드와의 관계가 더 끈끈하게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시몬스 체험 매장에서의 굿즈(기념품) 매출도 좋은 편으로 지난해 연 매출 1억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브랜드가 오프라인 공간을 내는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은희 교수는 “침대·자동차 등 제조업체의 경우 구매자가 아닌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과거 광고밖에 없었다”며 “공간이 소비자와의 새로운 소통 매개체로 떠오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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