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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칼을 매단 실은 언제라도 끊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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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이 확정된 직후인 10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지지자들 앞에서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이 확정된 직후인 10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지지자들 앞에서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석열-이재명 두 후보의 득표 차 0.73%포인트에는 그림자와 빛이 동시에 어려 있다. 그림자는 재차 확인된 우리 사회 이념·가치·정치 지형의 아찔한 단층이다. 빛은 그 단층의 위아래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견제 가능성이다. 민주주의는 불신을 기반으로 한 정치다. 국민은 독선의 정치를 심판했지만, 승자에게도 전폭적인 신뢰를 주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윤석열 정부의 입지 #철저한 친인척 관리 체계 갖추고 #대통령의 언어와 품격 고민해야

환호와 흥분, 포부와 기대가 당선인 주변에 넘쳐난다. 하지만 잔치는 이미 끝났다. 적어도 그렇게 각오하는 게 좋다. 한국의 대통령 자리는 등극하는 순간 내리막길이다. 머리 위에는 시퍼런 칼이 있고, 그 칼을 매단 실오라기는 시간이 갈수록 가늘어지는 법이다. 출발부터 험난하다. 윤석열 정부 앞에는 패배의 아픔을 곱씹고 있는 172석 단일 거대 야당이 버티고 있다. 윤 당선인은 선거 막판 "민주당이 탄핵 위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지지층 동원을 위한 엄살일 것이다. 하지만 탄핵 가능성은 소수 여당 대통령의 현실적 불안이다.

친인척 관리가 우선이다. 부인과 장모 리스크는 선거 내내 윤 당선인 캠프를 괴롭혔다. 친인척 문제로 곪은 정권은 흰개미가 속을 쏠아버린 나무 기둥이나 마찬가지다. 작은 촛불이라도 옮겨붙으면 한순간에 무너진다. 윤 당선인은 배우자 리스크 대책으로 제2부속실 폐지를 내걸었다. 그러나 어쨌든 대통령의 배우자다. 역할도 분명 있다. 합당한 예우는 하되 예산과 일정을 세세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는 게 차라리 좋은 방법이다. 대통령 부인의 '버킷 리스트' 논란과 의전 비용 시비를 자초한 지금 청와대가 반면교사다.

대통령 직속 특별감찰관 임명이 시급하다. 대통령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을 들여다보는 자리다. 박근혜 청와대에서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건드리다 ‘정보 유출’이라는 역공을 받고 물러난 뒤 여태껏 공석이다. 자신들이 야당 시절 발의한 법인데도 문재인 정부는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고 빈 사무실 임대료만 날리고 있다. 그 사이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사태, 문재인 정부의 조국 사태 등이 일어났다. 역할을 대신하리라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사실상 식물 기관이 됐다. 어물전 좌판이 썩어 가는데 소금조차 없었던 셈이다. 윤 당선인이 중립적 인사로 특별감찰관 추천을 국회에 요청한다면 대(對)국회 관계의 실마리도 될 수 있다.

언어와 이미지도 바꿔야 한다. 윤 당선인은 짧은 정치 기간 진화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 일방적으로 밀릴 거라던 TV토론은 의외로 선방했다. 그러나 유세장에서의 언어는 거칠었다. 정제되지 않은 인터뷰 답변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돼먹지 못한' '버르장머리' '철없는 미친 소리' '파시스트' 같은 말은 중도층에 거부감을 안겨줬다. 특히 '이대남'을 겨냥한 캠페인은 여성 배제라는 혐의를 벗지 못했다. 정치는 말이고,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말이 찌그러지면 정치와 철학도 찌그러진다. 최고의 이미지 컨설턴트와 연설 전문가를 기용해 변신을 꾀해야 한다.

"대통령은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지 않고는 어떤 조치도 이뤄지게 할 수 없다." 40여 년간 대통령 멘토 역할을 하면서 『대통령의 권력』이라는 책을 썼던 미국 정치학자 E 뉴스타트의 말이다. 군인 출신인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치 리더십의 작동 방식이 군대와 달라 자주 당황했다고 한다. 그의 보좌관은 "대통령은 자신이 결정한 일이 그걸로 끝나지 않고 되돌아와 충격을 받곤 했다"고 증언했다. 대통령의 화법이 검사와 같아서는 안 된다.

고대 그리스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는 신하 다모클레스에게 머리 위 칼이 도사린 자신의 자리를 권유했다. 그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권력이 지닌 위험을 경계하려는 겸허함이었을까, 나만이 위험을 감내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었을까. 오만함을 겸허함으로 착각했던 지난 5년이었다. 실은 언제라도 끊어진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