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汽船)이 바꾼 세계사
세계일주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나 마젤란(1480~1521)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도중에 죽었고, 1519년 9월에 함께 떠난 약 270명 대원 중 19명이(31명이라는 설도 있다) 1522년 9월에 포르투갈로 돌아온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면 3년 만에 돌아온 이 19명을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자로 볼 것인가. 마젤란의 명예를 살리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전에 몇 해 동안(1505~1512) 인도양 해역에서 활동하면서 말라카까지 간 일이 있으므로 그곳을 출발점으로 세계일주를 이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10년 전의 다른 볼일을 세계일주의 일부로 본다는 것이 좀 억지스럽기도 하고, 그가 죽은 필리핀에서 말라카까지 거리도 작지 않다.
증기기관 선박 19세기 초에 첫선
1838년엔 대서양 횡단 정기노선
‘범선의 시대’ 끝마친 서구의 약진
“시장 열어라” 동아시아 거센 압박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도 나와
16세기 마젤란 땐 3년 걸린 항해
첫 세계일주는 ‘말라카의 엔리케’?
또 하나 엉뚱해 보이는 주장이 있다. 마젤란이 1512년 말라카를 떠날 때 데리고 간 엔리케라는 이름의 노예는 항해 후 해방시켜 준다던 마젤란의 약속이 그가 죽은 후 지켜지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달아났다. 말라카가 그 지역 교역 중심지이던 당시 상황으로 보아 필리핀에서 도망한 엔리케가 고향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1521년 이후 행적이 말라카에서 확인된다면 ‘말라카의 엔리케’가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자로 인정받을 수도 있겠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나온 것은 마젤란 사후 350년이 지난 1872년이다. 대단한 모험가가 아니라도 돈만 넉넉히 쓰면 세계일주 여행이 가능하게 됐을 때다. 미국과 인도의 횡단철도가 완공되고(1870, 1869) 수에즈운하가 개통된(1869) 시점이다.
마젤란 함대의 3년에서 포그씨(『80일간의 세계일주』 주인공)의 80일까지 세계일주 기간이 14분의 1로 줄어든 것인데, 감축의 대부분은 마지막 50년 사이에 이뤄진 것이다. 베른이 태어난 1828년 무렵에 세계일주를 상상하는 소설이 나왔다면 『18개월간의 세계일주』란 제목이었을 것이다. 포그씨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기선이었는데, 기선의 대서양 횡단 정기노선은 1838년에 시작됐다.
증기기관은 18세기 초에 발명됐지만 선박 동력으로 활용되는 단계에 이른 것은 19세기 초의 일이다. 기선의 출현은 항해 활동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의 범선은 바람이 정해주는 항로와 일정을 따라야 했다. 해역과 계절에 따른 풍향 변화는 대항해시대를 뒷받침한 지리정보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1498년 인도양에 진입한 다가마는 10년 전 디아스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대륙 남단에 이른 것과 다른 항로를 취했다. 서아프리카(지금의 시에라리온)에서 서남쪽으로 대서양 깊숙이 들어갔다가 큰 호(弧)를 그리고 남아프리카로 돌아간 것이다. 디아스가 발견한 편서풍을 이용함으로써 항해 기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고, 이후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넘어가는 표준 항로가 됐다.
다가마 함대는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사이에 90일간 난바다에 떠 있었다. 보통사람은 한 달 이상 비타민C 공급이 끊기면 괴혈병의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신 과일이 괴혈병을 막아준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막연하게라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대비를 했지만, 항해가 예정보다 너무 늦춰지면 유령선이 돼버릴 위험이 있었다. 16~18세기 범선시대를 통해 약 200만 명의 선원이 괴혈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리 항로를 잘 골라도 장거리 항해 중에는 계절풍을 기다리기 위해 몇 달씩 머물러야 하는 곳들이 있었다. 돛의 방향을 조정해서 역풍을 뚫고 진행하는 기술이 있었지만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장거리 항해에는 쓸모가 없었다. 강력한 증기기관의 발전이 비로소 항해 활동을 바람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환상적인 부의 원천 ‘인도’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는 항해왕 엔히크(1394~1460)가 이끈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434년부터 사하라사막 너머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 해상강국인 스페인을 대표한 항해가 콜럼버스와 마젤란이 모두 포르투갈에서 오래 활동하다가 넘어온 사람이었다는 사실부터 두 나라의 선후 관계를 보여준다.
15세기 유럽인은 ‘인도’를 환상적인 부(富)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유럽을 둘러싼 이슬람세계 저 너머 향료를 비롯한 값진 물자가 나오는 곳이었다. 그 물자를 가지러 가는 길이 무슬림들에게 막혀 있었고 무슬림의 중계무역도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모험가들은 인도로 향하는 다른 항로를 찾아 나섰다.
포르투갈 함대들은 아프리카 남쪽 끝에서 대서양과 인도양이 이어져 있다는 이슬람 세계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끈질기게 남쪽을 향했다. 한편 후발주자 스페인이 아직 불확실하던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에 희망을 걸고 서쪽으로 향한 것은 투기성이 강한 모험이었다. 양쪽 다 목표는 인도였다. 카리브해 섬들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고도 ‘서인도’로 불린 것은 ‘서쪽에서 찾은 부의 원천’이라는 뜻이었다.
두 나라는 토르데시야스조약(1494)으로 유럽 밖의 세계를 나눠 갖기로 했다. 대서양상의 한 경도를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이 갖기로 한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포르투갈, 아메리카는 스페인의 몫으로 한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경도에 남아메리카 일부가 걸렸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브라질까지 갖게 됐다. 그리고 이 경도의 반대편 경도에 걸린다고 해서 스페인은 필리핀을 갖게 됐다.
아메리카에는 유럽세력에 대항할 문명이 없어서 바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반면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여러 문명세력이 뒤얽힌 가운데 끼어들어 복잡한 관계를 펼쳐가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 다른 유럽세력들이 포르투갈을 따라 아시아에 진출했지만 18세기 중엽까지는 해상세력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18세기 후반에야 영국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본격적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도 문제
1838년에 대서양 횡단 정기노선을 연 배 그레이트웨스턴호의 설계자는 이점바드 브루넬(1806~1859)이다. 2001년 BBC가 여론조사로 선정한 ‘위대한 영국인 100인’ 중 윈스턴 처칠에 이어 2위를 차지할 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던 이름이었다. 알고 보니 이 엔지니어는 영국 산업혁명의 한 주역으로, ‘영국의 풍경을 가장 크게 바꾼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다.
브루넬이 설계한 많은 건물과 교량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시대를 앞서간 그의 풍모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천재 엔지니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대상은 기선이었다. 대서양을 건너려면 짐보다 석탄을 더 많이 실어야 했던 그 시절에 그는 배가 클수록 경제성이 좋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배의 진행에 대한 물의 저항은 배 길이의 제곱에 비례하는데 용량은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레이트웨스턴호(1838, 길이 71.6m)와 그레이트브리튼호(1845, 98m) 모두 건조 당시 최대의 기선이었고, 특히 그레이트이스턴호(1859, 211m)는 최대 선박의 자리를 해체 때까지 지켰다.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 좋은 일일 때가 많지만, 너무 앞서가는 데는 문제가 있다. 1869년 개통된 수에즈운하를 너무 커서 통과할 수 없는 배가 그레이트이스턴호 하나였다. 수로와 항만도 그 크기 배에 맞춰져 있지 않은 곳이 많아서 충돌과 좌초 등 사고가 이어졌다. 1890년 해체에 이르기까지 기선 노릇 제대로 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브루넬의 배들처럼 첨단을 달리지 않더라도 기선의 성능은 계속 향상됐다. 큰 기선들이 1820년대부터 범선보다 몇 배 빠른 속도로 대양을 누비기 시작했다. 1793년 영국 사절 매카트니의 통상 확대와 외교관계 수립 요구가 청나라에 거절당할 때는 달리 어쩔 길이 없었다. 그러나 40여 년 후 아편전쟁(1839~1842) 때는 해상을 석권하고 인도에서 병력을 실어올 기선들이 갖춰져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에 개항 압력이 쏟아지기 시작한 조건이었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