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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심상정의 촌철살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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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2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방송토론회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왼쪽)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심 후보는 이날 토론회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이고 감세하는 복지는 사기다. 부유층을 대표하는 정당의 후보라면 어려운 재난의 시기에 고통을 분담해 달라고 하는 게 책임정치"라며 윤 후보를 압박했다. 연합뉴스

2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방송토론회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왼쪽)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심 후보는 이날 토론회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이고 감세하는 복지는 사기다. 부유층을 대표하는 정당의 후보라면 어려운 재난의 시기에 고통을 분담해 달라고 하는 게 책임정치"라며 윤 후보를 압박했다. 연합뉴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감세하는 복지는 사기.”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촌철살인인데, 지난주 대선 후보 3차 토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발언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비슷한 발언은 있었다. 멀리는 10년 전인 2012년 대선 TV토론에서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박근혜 후보 간의 복지 논쟁이 있었다. “증세 없이 복지가 가능합니까?”라는 문 후보의 질문에 박 후보는 “제가 대통령이 되면 할 겁니다”라고 답했다. 유승민 전 의원은 2015년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에 박근혜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를 공격했다 ‘배신자’ 소리까지 들었다.

“감세하는 복지는 사기” 경고음 #감세 공약 슬기롭게 솎아내야 #증세 부담, 미래와 나눠질 수도

 이번에 거대 정당의 두 후보 모두 증세 계획을 밝히지 않았고 그저 다른 예산을 아껴서(지출 구조조정)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지출 구조조정은 말이 쉽지, 실행하긴 어렵다. 깎기 힘든 경직성 경비가 많아서다. 받아야 할 세금을 면제하거나 줄여주는 비과세·감면 축소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한번 혜택을 받으면 나중엔 당연한 권리처럼 인식하는 게 세상인심인지라 비과세·감면 하나를 줄이려면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저출생·고령화로 현재 복지 수준을 유지해도 복지예산은 계속 늘어나는 구조인데 새로운 복지 소요도 추가된다. 문재인 정부도 아동수당을 도입했고 노인 기초연금을 올렸으며 한국형 실업부조를 지난해 시작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밑도는 우리의 복지지출 수준을 지금보다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공감대가 있다. 한데 늘어나는 복지 지출은 감당하려면 국채를 발행해 나랏빚을 늘리든지, 세금을 더 걷든지, 두 방법뿐이다. 10년 전 대선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의 ‘증세 없이 복지’를 공격했던 문재인 후보는 정작 자신이 대통령이 되자 법인세 최고세율을 25%로 올린 것 외에는 증권거래세를 내리는 등 오히려 감세했다. 증세 없는 복지는 고스란히 나랏빚 증가로 이어졌고, 미래세대의 부담으로 전가됐다. 올해 나랏빚은 1000조원을 넘어선다.

 나랏빚을 무작정 늘릴 수도 없다. 정부가 빚을 너무 많이 내면 시장금리를 밀어 올리고 이는 기업 투자를 위축시킨다. 글로벌 경제는 요즘 유가가 치솟고 금리가 오르며 달러가 세지는 ‘3고(高)’ 흐름이다. 러시아가 지급불능을 선언하는 디폴트 사태가 오면 국제금융시장이 경색되고 신흥국에서 달러가 빠져나가는 위기가 올 수 있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에게 이런 대외변수를 결정할 힘은 없다. 국내 충격이 최소화하도록 거시경제 여건을 잘 관리하는 것 외에 무슨 용빼는 재주는 없다.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국장은 국가부채비율이 늘어나도 괜찮을지는 우리가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했다.

 유가와 원자잿값이 치솟고 환율까지 오르며 물가도 심상치 않다. 이번처럼 공급 측면의 충격으로 물가가 오르면 정부가 내놓을 단기 대책이 많지 않다. 인위적인 가격 통제는 부작용만 부른다.

 대선 과정에서 표를 얻기 위해 던져놓은 공약부터 재점검하기 바란다. 일단 시급한 건 정부부터 시급하지 않은 현금성 지출을 줄여 물가에 부담 주는 정책을 스스로 자제하는 것이다. 코로나 피해 보상을 위한 추경 편성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최근 대내외 여건에 맞게 규모와 속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선거용 감세 공약도 전체적인 세제 개편의 틀 안에서 재검토하기 바란다. 장기적으로 종부세를 재산세와 통합하고 주식양도세도 폐지한다는 공약이 대표적이다. 재정학자인 전주성 이대 교수는 재산소득에 더 과세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지난해처럼 너무 과속하지 않고 시장이 적응할 정도로 점진적으로 세금을 늘린다면 말이다. 그는 최근 출간한 『재정전쟁』에서 연금·조세개혁의 정치적 부담을 정권 간에 나누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번 정부에서는 전문가 집단이 오직 최선의 시안을 만들고 다음 정부에서 실행되도록 합의를 끌어내자는 것이다. 이창용 국장도 올해 초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앞으로 10년간 매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0.5%씩 세수를 늘리고 이를 복지 재원으로 연계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부담을 미래로 분산하자는 취지다.

 세제 개혁이라는 청사진 없이 조각조각 발표된 세금 공약이 비효율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누더기 세제를 더 엉망으로 만들까 걱정이다. 슬기로운 공약 솎아내기가 필요하다. “정부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하겠다”는 윤석열 당선인의 말처럼 용기 있게 잘못을 인정하고 공약을 되돌리면 국민도 이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