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날리는 눈보라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질 정도였다. 하늘거리는 얇은 옷을 입고 나온 모델들은 옷깃을 잔뜩 여몄고, 몇몇은 검은 소지품을 가득 넣은 검은 자루를 들고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6일(현지시각) 파리 패션위크에서 열린 발렌시아가 2022 가을·겨울 쇼의 장면이다.
이 패션쇼는 우크라이나어 시 낭송으로 시작됐다. 쇼장 525개의 좌석 위에는 노란색과 파란색, 우크라이나 국기 색의 티셔츠가 놓여있었다. 메모에는 “지금 상황에서 패션위크를 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쇼 취소는 ‘항복’을 의미하기에 강행한다”고 쓰여 있었다. 이 브랜드의 아티스틱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의 메시지다.
난민 출신 디자이너, 패션쇼로 공감 표현
유엔난민기구(UNHCR)는 8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생한 난민 수가 201만 명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불과 2주 만의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발렌시아가 패션쇼는 난민에 대한 강력한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본래 기후 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던 인공 눈 세트는 난민들의 험난한 발걸음을, 검은색 봉투를 들고 비틀거리며 걷는 모델들은 경황없이 짐을 싸 터전을 떠나는 난민들의 모습을 비유했다.
쇼에는 디렉터 뎀나바잘리아의 개인적 아픔도 반영됐다. 그는 지난 1993년 압하지아-조지아 분쟁으로 난민이 되어 집을 떠난 경험이 있다. 바잘리아는 쇼 메모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1993년 이후로 내 마음속에 자리한 트라우마를 촉발했다”며 “내 조국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었고 나는 영원한 난민이 되었다”고 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쇼가 끝난 후 무대 뒤에서 바잘리아는 “30여년 전 지붕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보호소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 패션은 중요하지 않다. 메시지는 사랑과 평화여야 하고, 패션은 이 위기에서 강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쇼 메시지에서 그치지 않고, 발렌시아가는 현재 러시아에서 소매 거래를 중단한 상태다. 또한 전쟁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세계식량계획(WFP)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물건 안 판다” 패션업계 보이콧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여론이 악화하면서 패션 업계의 ‘러시아 엑소더스’가 본격화하고 있다. 주로 영업을 중단하고 매장을 폐쇄하거나, 배송을 중단하는 형태가 많다. 유엔난민기구 등을 통한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일 에르메스가 러시아에서의 모든 상업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힌 이후 6일부터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도 러시아 매장 운영 중단에 돌입했다. 러시아 전역 120여 곳 매장이다. AFP·로이터 등에 따르면 LVMH는 “이 지역의 최근 상황을 고려해 오는 6일부터 러시아 매장을 일시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샤넬도 러시아 내 17개 매장의 문을 닫았다. 구찌·발렌시아가·생로랑 등을 보유한 케링 그룹과 프라다 그룹, 몽클레르도 러시아 매장 일시 중단을 결정했다. 에스티로더·로레알·유니레버 등 뷰티 기업들도 러시아 내 모든 사업 활동 중단에 나섰다. 버버리와 마이테레사 등은 러시아로의 배송을 중단시켰다.
H&M그룹은 지난 2일 러시아 내 170여개 매장 판매를 일시 중단한다고 밝혔다. 자라의 모기업 인디텍스 그룹도 502개의 러시아 매장을 임시 폐쇄하고 영업을 중단한 상태다.
영업 중단 등의 보이콧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LVMH는 지난 2일 국제 적십자 위원회에 500만 유로(약 67억원)를 기부했다. 버버리도 영국 적십자사를 통해 동참했다. 케링 그룹의 구찌 역시 유엔난민기구에 50만 달러(약 6억원)를 기부해 우크라이나 난민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