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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 종교의 삶을 묻다

중국 동포 품기 20년…주중엔 숙소, 주말엔 예배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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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가리봉동 한중사랑교회 서영희 목사 

한중사랑교회 서영희 목사는 “윤동주 시인도 만주 땅에서 태어났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국적을 받은 조선족도 우리 동포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한중사랑교회 서영희 목사는 “윤동주 시인도 만주 땅에서 태어났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국적을 받은 조선족도 우리 동포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중국의 조선족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 그중에서 80~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다. 지난 2일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한중사랑교회를 찾았다. 20년 넘게 중국 동포를 대상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교회다. 거기서 서영희(65) 담임목사를 만났다. 중학교 교사 출신인 그에게 “왜 중국 동포 선교인가?”를 물었다.

서 목사는 고려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뒤에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오피스텔 방 3개 구해 선교 시작
남편의 후원금으로 어렵게 운영

불법체류 불안감 큰 동포들 위로
지금은 오피스텔 방 20개로 늘어

법률·학습 지원, 의료봉사도 펼쳐
“중국동포 없으면 한국산업 흔들”

뇌수증에 걸린 둘째아들의 기적

어떻게 기독교인이 됐나.
“교사 생활을 하면서 주말에는 쉬고 싶었다. 그런데 교회 집사인 시어머니께서 주일날 내 옷을 다리셨다. 할 수 없이 교회에 나갔다. 세례는 받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있다면 보여달라. 그렇게 생각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100일쯤 됐을 때 뇌수증에 걸렸다. 뇌에 물이 고여서 빠지지 않는 병이다. 서울대병원 의사는 물의 압력이 높아져 뇌를 누르면 귀머거리나 장님이 될 수도 있고, 정신박약아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두 손으로 들면 요만한 아기였다. 생후 100일 된 아기에게 뇌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후 후유증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서울대병원 안의 작은 예배당으로 갔다. 거기서 기도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 갓 난 아들이 죽게 생겼는데 말이다.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렇게 기도했다. ‘살려만 주시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기도하며 모든 걸 하나님께 맡겨버렸다. 내 걱정과 두려움도 다 맡겼다. 그랬더니 놀라운 변화가 오더라.”
어떤 변화인가.
“내 마음이 평안해지더라. 아들 수술 날 아침에 남편과 시어머니는 아예 숟가락도 들지 못했다. 나는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평소 같으면 체했을 거다. 그런데 소화도 잘됐다.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겼으니까. 엄마가 힘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 시간에 걸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계시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따질 것도 없이 말이다. 그와 더불어 내 삶의 어둠이 밝아지더라.” 물론 그 전에도 삶의 즐거움은 있었다. “그런 즐거움은 1주일을 안 가더라. 아이들 키우고, 집안을 꾸미고, 커튼을 바꾸어도 즐거움은 있다. 그런데 1주일을 못 넘더라. 내 삶에 영원한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알게 됐다. 신앙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더라.”

조선족 입주도우미와의 만남

큰 아이가 고1, 둘째 아이가 중1이었을 때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집은 서울이었지만, 경기도 용인시 양지에 있는 총신대 신학대학원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했다. 주말에만 집으로 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남편 이상부 장로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입주해서 가사를 도와줄 도우미가 필요했다.

어떤 분이 오셨나.
“조선족이셨다. 중국에서 17년간 교장 선생님 하신 분이었다. 30년간 공산당 간부도 하셨더라. 아주 정직하고, 성실하고, 일 처리가 확실한 분이었다. 그런데 밤에 잠을 못 잔다고 했다. 수면제와 안정제 등 약을 많이 드시더라. 중국에서는 사람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가르쳤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늘 불안하다고 했다.”

20년 전만 해도 국내에 있는 중국 동포의 상당수가 불법 체류자였다. 중국에서 브로커에게 1000만원을 줘야 3개월짜리 한국 비자를 구할 수 있었다. 대부분 1000만원씩 빚을 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면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됐다. 한 달에 기껏해야 100만~150만원을 버는데, 석 달 모아서 1000만원 빚을 갚을 수는 없었다. 만약 중간에 잡혀서 강제 추방이라도 당하면 빚 갚을 길은 요원했다.

주말에 집에 올 때마다 그는 가사 도우미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했다. 물음이 이어졌고 답도 이어졌다. “그러다가 하루는 그분께서 ‘도리(道理) 있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중국 동포 표현으로 ‘이치에 맞다’ ‘수긍할 만하다’란 뜻이더라. 그렇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마음이 평안해졌다고 했다. 수면제도 끊고 잠이 잘 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등포에 가면 힘들게 사는 중국 동포가 많다고 했다. 그들에게 이걸 좀 전해달라고 했다.”

그 요청을 듣고서 어떻게 했나.
“모른 척했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계속 하나님 음성으로 내 안에서 맴돌더라.”

그는 결국 영등포로 갔다. 신학대 졸업 전이라 전도사 신분이었다. 중국 동포 중에는 그를 “도사님, 도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저기 ‘전도사’라고 돼 있지 않나. 성이 전씨이고 도사님 아닌가”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도교 사원에 있는 성직자를 “도사”라고 부른다.

신학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도 중국 동포 선교에 집중했다. “1000만원 빚을 지고서 한국에 오면 당장 숙소가 없었다.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잘 곳이 없었다. 찜질방 갈 돈도 없으니까. 차를 기다리는 척하면서 대합실에서 자기도 하고, 건물 안에 들어가 라면 박스에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부부는 자존심이 있어서 여행용 가방을 들고 밤새도록 걸었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이 영등포에 있던 제자들을 불렀다. 스승은 권위가 있었고, 제자들은 교장 선생님을 믿었다. 빠른 속도로 교인 수가 늘었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남편의 후원금으로 가리봉동에 오피스텔 방 3개를 매입했다. 주중에는 중국 동포의 숙소로 쓰고, 주말에는 예배당으로 썼다. 교회 재정은 늘 적자였다. 20년 가까이 남편의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교회 오는 차비가 1000원이라고 하자. 이분들은 그 돈을 아끼려고 걸어서 온다. 주일날 일하면 일당 5만~6만원을 번다. 교회 출석하면 그걸 포기하고 오는 거다. 당시 중국은 중등교사 월급이 한국 돈으로 5만원 정도였다. 그러니 하루 쉬면서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는 건 굉장한 희생이었다. 헌금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지난해 처음으로 재정자립 이뤄

최근에서야 중국 동포들도 ‘교회 헌금’의 의미를 이해한다. 지난해 처음으로 교회의 재정 자립을 이루었다. 요즘은 중국 동포뿐 아니라 한족도 많이 찾아온다. 중국어로 드리는 예배를 따로 마련했을 정도다. 지금은 오피스텔 건물의 1층과 2층, 그리고 3층 일부 등 20개가 넘는 방을 쓰고 있다.

한중사랑교회의 총 등록 교인은 2만 명이 넘는다.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교인들도 꽤 있다. 실제 출석 교인 수는 2000~3000명 정도다.

한중사랑교회는 단순한 교회가 아니다. 중국 동포들의 현실적 고충을 하나씩 해결해주는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임금 체불과 노동력 착취 등에 대한 무료 법률 상담, 맞벌이 부부의 아이를 위한 방과 후 학습 교실, 의사와 의대생들 30~40명이 와서 교회에서 정기적인 의료 봉사도 이루어진다. 법무부로부터 ‘동포 체류 지원센터’로 지정도 받았다.

서 목사는 “역사를 돌아보면 중국 동포는 우리 핏줄이다. 한국 사람은 지금 이 시점만 보면서 우리 동포를 내친다. 우리는 저출산 등 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3D 업종에 종사하는 동포분들이 없다면 우리나라 산업의 근간도 어려워진다”며 “이분들에 대한 평가의 눈을 거두고,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서 목사에게 가슴에 꽂고 사는 성경 구절 하나를 물었다. 그는 이 구절을 뽑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7~3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