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세린클라크의 문화산책

줄 빠진 기타, 비 맞은 해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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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대전에서 운전하던 중에, 길가에 내놓은 생활 쓰레기 더미 속에 버려진 기타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자취생이나 한국 단기 체류자는 생활 집기를 따로 살 필요가 없다. 당신에게 필요한 물건이 고급 품목만 아니면 주말에 아파트 단지를 거닐다가 결국 찾게 될 것이다. 다만, 버린 물건에는 전 주인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 함부로 집에 들이면 자칫 재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한국인이 여럿 있었다.

이 경고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런 ‘운’은 충동구매와 계획적 싫증이라는 규범이 성립되기 전 시대의 유물이라 간주하기로 했다. 오늘날 가구나 생활 집기가 버려지는 이유는 전 소유주가 운이 없거나 죽어서라기보다, 이사를 하거나 새 물건을 들이면서 쓸모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21세기의 부유한 도시인들은 새 장소와 새 생활에 맞는 새 물건을 원한다. 그리고 쓰던 것을 버리고 보증 기간 갱신, 무료 설치, 에너지 효율 증가, 자동 전원 기능 같은 혜택과 함께 ‘스마트한’ 최신 집기와 가구를 들이는 편이 더 저렴한 경우도 꽤 있다.

여기저기 버려진 악기들
옛 주인의 시간·사연 담겨
함부로 할 수 없는 유물들
인간에 대한 상상력 넓혀

서울 낙원상가에 진열된 기타들. 앞으로 어떤 사연을 풀어낼까. [중앙포토]

서울 낙원상가에 진열된 기타들. 앞으로 어떤 사연을 풀어낼까. [중앙포토]

그러나 나로서는 그 물건 속에 깃든 과거의 혼 때문에 가져오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한 번은 지리산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한 늙은 예술가의 그림을 서울의 어느 다리 아래에서 발견했다. 알래스카 주 깃발의 북두칠성을 호랑이로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이 우연히 내 눈에 들었고, 지금은 내 침실에 걸려 있다. 하지만 내가 제작자와 재료의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는 물건은 대부분 악기다.

지금 우리 집에는 오케스트라에 준하는 악기들이 모여 있다. 대부분 조금씩 손상된 부분이 있다. 빨간 벨벳 케이스에 담긴 바이올린은 흠 하나 없지만 줄받침을 갈아야 한다. 작년에 인천 아트플랫폼에서 친구들과 CD 녹음을 할 때 이 바이올린의 활과 송진을 사용해 가야금을 연주했다. 어느 비 내리는 날 반쯤 열린 진녹색 벨벳 케이스에 담겨 보슬비를 맞고 있던 초보자용 해금도 있다. 나중에 케이스 바깥 주머니에서 흑백 결혼사진 수십 장이 나왔는데, 원래 주인이 이혼한 게 아닐까 싶었다.

초보자용이긴 하지만, 막걸리 한두 잔을 걸치고 이 악기를 연주한 유명 해금 연주자들이 몇 있었다. 청이 떨어진 대금, 가죽이 해진 장구, 줄이 상한 가야금도 있다. 출국하는 친구, 동료들이 두고 간 거문고, 아쟁, 심지어 아코디언도 있다. 한때 내게 코토를 가르쳐 준 예전 스승님의 코토 역시 우리 집에 남아 주인과 재회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가끔 나는 팔다리가 달린 비파, 코토, 북이 춤추는 그림을 그린 19세기 말 가와나베 교사이처럼, 내가 집에 없을 때 이 악기들에게서 팔다리가 돋아나 합주를 하는 광경을 상상하곤 한다.

나는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마치 나를 보고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부르는 듯했던 하얀 기타를 살펴보았다. 기타, 바이올린, 피아노는 내 고향 알래스카를 둘러싼 통가스 국립산림지의 싯카 스프러스 음향목으로 만든 공명판을 사용한다. 1990년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사용한 악기의 18%가 싯카 스프러스로 제작되었다. 2016년에는 세계 기타의 80%가 최소 일부분이라도 태평양 북서부와 남동부 알래스카에서 온 싯카 스프러스로 제작됐다.

죽림칠현 중 한 명인 혜강(嵇康·223~ 262)은 그가 연주하던 금(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금을 만들 때 쓰이는 종류의 나무들은 그들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를 천 년 동안 기다린다. 그들은 조용히 안식하며 언제까지나 굳건하다.” 나의 유학사상 스승인 뚜웨이밍(杜維明) 교수는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인간 중심적 태도를 지양하고 자아와 가족, 도시, 지방, 국가, 세상을 초월해 성장함으로써 자연과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인간성과 인간애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1번 줄이 빠진 기타를 집어 들어 차에 실었다.

어린 시절, 내가 낮에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으면 우리 집고양이가 내 옆에 앉아 구경하다가 한밤중에 피아노 건반 위를 걸어 다녔다. 그 바람에 우리 가족은 피아노에 귀신이 들렸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고양이는 자신을 연주해 달라는 피아노의 초대에 응했던 건 아닐까.

조세린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