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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강수의 시선

대법관이 기자회견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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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회의실에서 조재연 대법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조 대법관은 자신을 대장동 녹취록 속에 등장하는 '그분'으로 지목한 뉴스 기사를 손에 들고 제기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특히 딸 부부가 판교 화찬대유 소유의 빌라나 수원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진영 기자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회의실에서 조재연 대법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조 대법관은 자신을 대장동 녹취록 속에 등장하는 '그분'으로 지목한 뉴스 기사를 손에 들고 제기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특히 딸 부부가 판교 화찬대유 소유의 빌라나 수원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진영 기자

"제가 대법관 조재연입니다."
 대선을 보름 앞둔 지난달 23일 헌정 사상 초유의 대법관 자청 기자회견은 이 말로 시작됐다. 전국 생중계 대선 TV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대장동 화천대유와 관련된 '그분'이 조재연 대법관이라는 게 지금 확인돼 보도되고 있다"고 실명을 공개한 지 이틀만이었다. 조 대법관은 "침묵할 경우 사법부 불신이 가중될 것을 우려해 밤새워 고민한 끝에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의 50억원짜리 빌라를 딸에게 빌려준 듯한 뉘앙스의 대화가 등장하는 2021년 2월 4일자 정영학 녹취록 내용은 물론이고 김 씨와 일면식도 없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김 씨 측 변호인단에 물어보니 "조 대법관은 모르는 분"이라며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이 난 아파트 인허가 사건의 공로를 정 회계사와 다투는 과정에서 가공의 인물로 내세운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법관 조재연은 어떤 사람일까. 프로필을 찾아보니 입지전적이라 할만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덕수상고를 나왔고 한국은행에 들어갔다. 성균관대 야간부 법학과에 진학한 뒤 서울 법대 출신 동기들을 제치고 사시22회에 수석합격해 판사가 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시국사건에서 소신 판결을 내려 '반골 판사'로 불렸다. 2017년 6월 양승태 대법원장이 대법관으로 제청, 여야 합의로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재가했다. 한쪽 진영으로 치우쳐 있지 않아 보인다. 개인적으론 2020년 6월 대법원이 주관한 경력법관 임용 과정에 평가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법원행정처장이던 그를 한번 본 게 인연의 전부다.
 "처음 우리 로펌에 왔을 때 급여 형태가 별산제라서 월말에 '더 달라, 덜 준다'는 분쟁이 잦았다. 대부분 더 달라는 건데 조 대법관은 한 일에 비해 너무 많이 준다며 적게 받으려 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몇달 뒤 고정 월급제로 돌리고나서 잠잠해졌다."
 조 대법관과 같은 로펌에서 일했던 동료의 기억이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우리는 아직 사건의 진실이 뭔지를 모른다. 검찰이든, 대법원이든 간에 진상 규명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이제 궁금한 건 이 후보가 왜 녹취록에 관련 대화만 있을 뿐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명을 공개했느냐다. 이 후보는 대장동 수사 초기, "정영학 녹취록에 천화동인 1호의 절반은 '그분' 것이라고 나온다"는 언론 보도 이후 '대장동 그분'으로 지목됐다. 그런데 최근 "녹취록상 그분이란 표현은 조 대법관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다른 보도가 나오자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전격 공개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내가 아니라 저분이 그분이라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폭로다. 대선을 앞두고 유권자의 표를 의식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실명 공개는 물리적 폭행보다 더 참혹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번 사태와 사안의 성격, 충격의 강도는 다르지만 '생중계→특정인 공개→반발'의 구조가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19년 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생방송 기자회견이다.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고 크게 성공하신 분이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자신의 형 노건평)한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없었으면 좋겠다". 이후 검찰 수사를 받던 남상국 사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법 적폐 수사로 직전 대법원장·대법관 등이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공당 후보의 사법부 경시 인식이 표출된 것은 아닌지도 우려스럽다. 사실 녹취록 속에 등장하는 '그분'이 누구를 지칭하건 '대장동 그분'의 실체가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장동 수익 구조를 설계하고 승인한 사람이 최종 책임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각한 건 대장동 '그분' 공방 속에 드러난 사법부의 위기대응 시스템 부재다. 지난해 말 이미 조 대법관 딸의 거처 관련 의혹이 제기됐다. 그때 선제적으로 진상 규명에 나서 사실이라면 수사 의뢰하고, 사실이 아니라면 정치권에 강력히 대처했어야 한다. 4개월 동안 수수방관하다가 생방송 폭탄을 맞고도 미동이 없다. 대법관 개인 문제이니 알아서 각자도생하라는 의미라면 위기 대응 시스템이 고장난 것이다.
 대법원장도 보이지 않는다. 취임사에서 약속했던 '좋은 재판' 대신 '정권 방패 재판'을 통한 사법 정치에만 골몰하는 한, 사법부 독립은 요원하다.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용지를 소쿠리·라면상자에 관리토록 방치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능력은 상관없이 우리 편이면 중용해온 함량 미달 인사의 부작용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생기는 부조리들이 굴러다닌다. '그분'은 대장동에만 있는 게 아니다.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이, '대장동 그분'이라며 실명 공개 #조재연 대법관, 회견서 의혹 부인 #사법부 위기 대응 시스템에 구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