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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전에도 이렇게 쫓겨났다…대물림한 우크라 고려인 비극

중앙일보

입력

장 파벨의 여동생이 지난 5일 아이와 함께 우크라이나를 떠나 루마니아로 피난을 떠나고 있다. 사진 장 파벨 제공

장 파벨의 여동생이 지난 5일 아이와 함께 우크라이나를 떠나 루마니아로 피난을 떠나고 있다. 사진 장 파벨 제공

“엄마한테 들을 땐 옛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우크라이나인 장 파벨(38)은 지난 7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있는 아들 장 오스카르(15)가 지난 5일 피난길에 나선 순간을 얘기하면서였다. 아들은 할머니, 고모와 함께 루마니아 국경을 넘었다. 고향에서 전해진 탈출 소식에 한국의 아빠는 가슴이 쓰렸다고 했다. 장 파벨은 “어릴 적 어머니가 말해준 외할머니의 아픔이 떠올랐다.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우리 가족에게도 닥친 것 같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소련 압박에 강제 이주했던 외할머니

장 파벨은 우크라이나의 고려인이다. 파벨 가족의 아픔은 8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인이 된 파벨의 외할머니는 1930년대 구소련의 사할린에 정착한 조선인이었다. 타향에 힘겹게 정을 붙이던 그녀에게 1937년 불행이 닥쳤다. 소련 정부가 극동지역에 머물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는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외할머니는 순식간에 터전을 잃고 다시 떠나야 했다. 십수 년에 걸친 계속된 이주. 그 끝에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정착했다. 오데사는 3대에 걸쳐 파벨 가족의 새로운 고향이 됐다.

지난 6일 루마니아에 도착한 장 파벨 가족은 임시 숙소에 머무르고 있다. 사진 장 파벨 제공

지난 6일 루마니아에 도착한 장 파벨 가족은 임시 숙소에 머무르고 있다. 사진 장 파벨 제공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파벨 가문의 가슴 속에 묻혔던 아픔이 되살아났다. 개전 초반에는 정붙인 고향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오데사까지 근접하면서 생존을 위한 대피를 택했다. 눈물을 머금고 터전을 떠나야 했던 85년 전 아픔의 재현이었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가해국은 러시아였다.

지난 6일 루마니아에 도착한 장 오스카르가 조카를 돌보고 있다. 사진 장 파벨 제공

지난 6일 루마니아에 도착한 장 오스카르가 조카를 돌보고 있다. 사진 장 파벨 제공

불행 중 다행으로 지난 5일 파벨의 아들 장 오스카르는 고모 가족, 할머니와 함께 한국인 목사의 차량에 탑승해 국경을 넘었다. 이들은 루마니아 콘스탄차에 임시로 머물면서 한국으로 입국할 방안을 찾고 있다.

장 파벨의 조카는 지난 6일 우크라이나를 떠나 루마니아의 임시숙소에 머물고있다. 사진 장 파벨 제공

장 파벨의 조카는 지난 6일 우크라이나를 떠나 루마니아의 임시숙소에 머물고있다. 사진 장 파벨 제공

충북 청주에서 일하던 장 파벨은 지난 7일 직장을 그만두고 루마니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들과 여동생, 어머니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다. 그는 “제발 루마니아에서 아들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폴란드로 피난길 오른 고려인 손자·손녀들

충북 음성에 일하고 있는지 뱌체슬라브(41)도 최근 우크라이나에 있는 아들과 딸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우크라이나 고려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4년 전 아이들의 교육비와 양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홀로 한국에 왔다. 자포리자에 남은 아이들은 러시아의 공습이 이어지자 할머니와 함께 지난 7일 오후 리비우행 기차에 올랐다고 한다. 리비우는 폴란드로부터 70㎞ 떨어져 있다. 리비우에 이르더라도 언제 폴란드로 넘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피난을 가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사람들이 리비우로 모이고 있어서다.

지 뱌체슬라브는 폴란드 이후가 걱정이라고 했다. 아들이 여권이 없고 학교로부터 서류를 받지 못한 터라 한국 비자 발급이 어려울 수 있다고 염려한다. 그는 “3대가 살아온 집을 버리고 떠나려니 옛날 강제로 이주당한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랬으려나 싶다”고 했다. 이어 “올여름 아이들을 데려오려고 했었는데 전쟁이 나서 너무 힘든 상황이 됐다. 한국 정부가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고려인 동포 국내 체류 지원해야”

법무부는 최근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자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비자(사증) 신청서류를 간소화하겠다고 8일 밝혔다. 우크라이나 동포와 가족은 여권 또는 신분증으로 동포라는 사실이 확인되면 단기 비자를 받을 수 있다. 결혼 이민자 등 국내 장기체류자의 동반가족도 그 사실을 입증하면 비자를 발급할 수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우크라이나엔 재외동포 1만 3000여명이 머물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우크라이나 동포, 국내 장기체류자의 현지 가족 등이 국내로 들어올 길을 넓히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고려인을 돕고 있는 단체 ‘고려인 너머’ 김영숙 사무총장은 “내전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포를 위해 모국이 포용 정책에 나서야 한다”며 “아프간 난민에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장기체류하게 해준 것처럼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의 국내 체류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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