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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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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자식과 부모는 지지하는 후보가 흔히 다르다. 이번 대선에서 20대 자녀가 같은 편이길 원해 종일 정치 방송을 틀어둔 엄마, 가족 단톡방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연설문을 올린 아빠가 있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진 못한 듯하다. 자식은 원래 아버지를 밟고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대신 나는 지난 몇 달간 좋은 참고가 될 타인들을 찾았다. 대선 후보들의 정책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들어 나만의 감별 작업을 위해 본 것은 다큐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과 바우만 등이 지은 『거대한 후퇴』,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이다. 너와 내가 교차하면서 역사는 만들어지므로 나를 어떤 타인과 교차시킬까가 중요한 문제였다.

“모든 승패의 대단원은 늘 평범”
포퓰리즘으로의 퇴행 경계해야
대선 이후 시간 더 고단할 수도

‘미싱타는 여자들’의 이숙희·신순애·임미경, 세 선배 여성은 청계천에서 미싱을 타며 노동교실에서 공부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1977년 9월 9일 노동교실 폐쇄 속에서 구속되고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이는 그녀들 삶에 평생 영향을 미쳤는데, 영화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 때 세 여성의 눈물이 뺨을 타고 코와 입으로 삼켜지는 모습을 보면서 다가올 역사의 시간을 어떻게 가꿀지 하나의 실마리를 얻었다. 세 여성처럼 부지불식간에 역사의 물결에 올라타 공리(公理)를 일구는 삶을 산 이들은 고립된 대중에게 참조할 텍스트가 된다. 그녀들 삶은 한때 혼란의 실뭉치였지만, 이제는 미싱질로 천과 천을 이어주는 단정한 박음질이 되고 있다.

토크빌은 평등화된 민주화 시대에 대중이 아는 정보는 제한돼 있어 전지전능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탕누어 역시 어떤 이가 권력을 잡든 간에 “모든 승패의 대단원은 늘 평범하다”는 비관 섞인 이야기를 했다. 그렇더라도 국민은 현실 속 겹겹의 난관을 제힘으로 돌파해야 하고, 전체 의사라는 거대한 압력 속에서 개인 고유의 답을 얻어야 한다. 끝에 가서는 대부분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을 주류 바깥에 놓아보는 시도도 필요하다.

이럴 때 도움이 된 책은 유럽과 미국의 정치 상황을 다각도로 분석한 『거대한 후퇴』였다. 미국과 유럽이 지난 몇 년간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시대로 퇴행했듯이 2022년 한국도 권위주의 시대로 되돌아갈 선택을 한다면 대가를 꼬박 다시 치를 거라는 점을 책은 선명히 일러준다. “민주주의의 약화는 자유와 심사숙고와 폭넓음이라는 요소를 폐기하겠다고 공약한 지도자가 당선되는 토대다.”(아파두라이) 정치는 종종 불행을 안겨준다. 거짓말에 낯을 요리조리 바꾸는 데다 권력 추구자들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변별력 떨어지는 후보들 속에서도 전 세계에 포퓰리즘의 위기를 가져온 지난날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민주주의와 (신)권위주의 사이에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뽑을 것인가? 정치란 집체적 행위이므로 거기서 가장 탁월한 사람이나 사물을 발견하긴 힘들다. 그래도 저마다 후보의 인식과 견해, 편견, 이익을 검토해봤을 것이다. 특히 인식은 정확한 것이 아름다우며, 이는 곧 언어의 정확함으로도 연결된다. 그러나 정치 캠페인의 언어는 늘 정확함과는 거리가 멀다. 인식보다는 열정을 자극하는 목적의식 속에서 막말 퍼레이드로 귀결되거나 말이 말을 덮고 뒤집는 인식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 속에서 마음을 결정짓기란 실로 힘든 일이다. 이런 퇴행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책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자신이 만든 책을 손수 버리게 될 때가 있다. 이사 가면서, 퇴사하면서 편집자들은 온 힘을 쏟아 만든 책을 이젠 처리 대상으로 여기고, 독자에게 주려고 정성껏 제작한 굿즈를 재고 부담으로 여긴다. 즉 제 발로 자신이 일군 것을 차버리는 때가 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늘 이 사람을 선택하면서 과거의 저 사람을 잊어버린다. 즉 큰 심사숙고 없이 눈앞의 결정을 신속히 내리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는 후세대가 책잡을 시대의 우매함이 되기도 한다.

이번 대선이 끝나면 우리는 더 고난도의 삶을 살라는 요구에 직면할 것 같다. 코로나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사태로 힘들지만, 이제 한 시기를 끝맺고 좀 더 이질적인 세계를 대면하게 될 것이다. 단맛 쓴맛 다 보며 살아왔지만 다시 이성(理性)의 시간이 왔다. 개개인이 파편화된 삶 속에 있긴 하나 자신을 역사의 흐름에 위치시켜 시대의 증언자가 되길 바라며, 내 삶 속에서 가장 좋은 타인들을 참조해 인식력과 상상력을 넓힘으로써 중요한 시대를 잘 건너가길 바랄 따름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