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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반전'의 20대 대선…여야·유튜버 착각하고 있다 [outl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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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 교수가 본 ‘투표와 대선’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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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관련한 익숙한 비유 중 하나는 아마 ‘전쟁’일 것이다. 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후보를 잘못 뽑으면 나라를 잃을 것만 같은 선거 말이다. 후보들은 캠프라는 참호를 파고, 캠프 관계자들은 지정된 시간에 폭로를 터트리며, 나누어진 ‘진영’의 보병들은 쉴 새 없이 손가락으로 뭔가를 만들고 쓰고 퍼뜨린다. 실로 내전 같은 선거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수많은 유권자는 폐허가 된 전쟁 피해자의 마음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은 채 기표소로 홀린 듯 줄지어 걸어들어갈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선택지에 사람 ‘인(人)’ 모양의 흔적을 남기려고 굳이 마스크와 비닐장갑으로 중무장하지 않아도 이미 엄중하고 고독할 그 억겁의 5초를 사방이 막힌 기표소에서 견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무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대통령의 당선 확정을 기다리며 저녁 채널을 하염없이 돌리기만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20대 대통령선거일은 저물어갈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혹여 이것이 억울하거나 서럽지 않은가?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말이 일말의 진실이라도 담고 있다면 적어도 장터와 구경꾼들이 있고, 나누어지는 담소가 있어야 할 것이며, 축하와 위로가, 현재와 미래가, 그리고 명예와 반성과 기약이 교차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선거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고, 오늘이 그렇게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유튜브에 의하면 나라를 북한의 김정은에게 바치거나 검찰에게 갖다 바칠 대통령 중 하나를 우리가 보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직을 맡게 된 사람이 굳이 나라를 “김정은에게 갖다 바칠” 이유도, 굳이 “검찰 독재”를 새삼 시작할 이유도, 동기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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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 표는 미래 담긴 바둑 한 점, 아름다운 기보로 남기를

 8일 세종시 보람동 대선후보 선거 벽보를 학생들이 보고 있다. JTBC와 지상파 3사는 9일(오늘) 치러지는 제20대 대통령선거 출구조사 결과를 오후 7시30분에 각각 발표할 예정이다. [뉴스1]

8일 세종시 보람동 대선후보 선거 벽보를 학생들이 보고 있다. JTBC와 지상파 3사는 9일(오늘) 치러지는 제20대 대통령선거 출구조사 결과를 오후 7시30분에 각각 발표할 예정이다. [뉴스1]

더 중요하게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화 이후 35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2명의 대통령이 국회에 의해 탄핵됐으며, 4명의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켰던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볼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래서 오늘 투표소에 가실 유권자들이 그만큼이라도 안심하고 약간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기표와 투표를 잘 견디고 수행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적어도 35년 전만 하더라도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기 위한 땀과 피와 눈물을 뿌렸던 때가 있었으며, 눈을 들어보면 지금도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대통령과 전장에서 아들을 잃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들이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잠시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치르는 일은 투쟁도, 전쟁도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5년 임시직 공무원을 뽑는 선거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2008년 미 대선 패자, 존 매케인의 품격

그래도 독자들이 선거를 견딜 자신이 없으면 유튜브에 가서 2008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지금은 고인이 된 존 매케인 후보의 여러 영상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2008년 미국 대선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가 선출됐던 선거지만, 그 선거에서 누구나 기억하는 장면은 “오바마는 믿지 못할 아랍인”이라고 하는 지지자들에게 매케인이 “아닙니다. 그분은 훌륭한 가장이자 시민이고, 우리는 다만 주요한 정책적 입장이 다를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던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매케인

매케인

우리의 후보들과 정당들이, 그리고 그 지지자들과 언론이, 나아가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자랑하는 유튜버들이 결정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선거는 민주주의에서 승자를 가리는 매우 기계적인 과정이라는 오해다. 왜냐하면 선거에서 누구를 뽑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뽑힌 누군가가 이후 어떤 내용의 정치를 펼칠 것인가가 선거의 열린 장에서 토론되고 결정돼야 하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범죄자라서 토론할 수 없다거나, 상대방이 거짓말만 한다는 태도는 선거를 치르는 태도라기보다는 전쟁을 치르는 태도며,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 상흔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을 우리는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다. 이것을 우리는 결코 축제라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선거에 대한 보다 나은 비유는 전쟁이라기보다는 바둑일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기는 하지만 사망자도, 부상자도 없이 두 사람의 수담(手談)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 우연찮게도 프로바둑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이들이 승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 점의 아름다운 기보(棋譜)를 남기는 일이라는 말이다. 전쟁 같은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가 얻은 것은 유권자들의 마음의 상처이고, 남기지 못한 것은 우리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각종 시급하고 다양한 문제에 대한 논쟁의 기록이었다. 후보들의 최선이 담긴 아름다운 기보는커녕 후보들의 최악으로 얼룩진 난타의 기록만 남았다.

청년 문제, 저출산 문제, 경제 문제, 정치개혁 문제 등의 이야기들이 마치 열등생의 답안지처럼 체계 없는 단문의 구호들로 생각날 때마다 마구 던져졌지만, 관심과 클릭을 끌지 못할 이야기들을 심각하게 다루는 곳은 없었다. 청년 문제보다 심각한 것이 지방 청년 문제며, 저출산 문제보다 심각한 것이 지방의 저출산 문제라는 당연한 이야기는 그 어느 후보도 하지 않았다. 그 공배에는 얻을 표가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등돌린 이들의 용서·이해 먼저 구해야

반전은 정작 역대급 사전투표율에 있었다. 내전 같은 선거와 실망스러운 후보들을 두고서도 조용히 마스크를 쓰고 순례하듯 사전투표소에 줄지어 선 유권자들이 원했던 것은 그런 불완전한 선거의 기록에 그나마 하나의 점이라도 보태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그 어른스러운 인내심이 오늘에도 이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오늘 밤, 미처 준비되지 못한 마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게 된다. 당연히 승리의 환호와 패배의 눈물이 교차할 것이지만, 그 가운데 아름다운 선거를 치르지 못한 후보들의 뼈아픈 반성이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이들의 용서와 이해 없이 앞으로의 5년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움을, 그리고 패배한 후보들과 정당 또한 국정을 이끌어나갈 파트너라는 성찰의 목소리가 들렸으면 한다. 그래서 당선자에게든, 낙선자에게든 던진 우리의 한 표가 여전히 대한민국의 미래 설계도에 남는 의미 있는 한 점이었음을 상기할 수 있으면 한다. 오늘, 동료 시민들의 건투를 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국 미시간대 정치학 박사이고 미국 선거조사 펠로와 플로리다대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정당학회 부회장이며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위원이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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