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달러 환율이 1230원을 돌파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로 국제유가가 뛰고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높아진 영향이다. 8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원화 가치가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 지난 7일 달러당 1220원 선을 뚫고 내려간 지 불과 하루 만에 달러당 1230원마저 무너졌다.
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값은 달러당 1237원으로, 전날보다 9.9원 떨어졌다(환율 상승). 2020년 5월 29일(1238.5원) 이후 1년 9개월 만의 최저치다. 장중엔 달러당 1238.7원까지 밀렸다.
심상치 않은 건 폭과 속도다. 지난 4일부터 3거래일 만에 32.4원(2.69%)이나 내렸고, 올해 들어서는 48.2원(4.05%) 떨어졌다. 선진국 및 신흥국 통화와 비교해도 큰 폭의 하락세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들어 달러화 대비 원화값보다 하락 폭이 큰 통화는 러시아 루블화(-76.7%)와 터키 리라화(-8.9%), 유로화(-4.5%) 정도뿐이다.

곤두박질치는 원화 가치.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원화값 하락은 우크라이나 사태의 반작용이다. 무엇보다 '오일 쇼크' 여파가 컸다. 7일(현지시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와 브렌트유는 장중 배럴당 130달러를 돌파했다. 모두 2008년 7월 이후 최고가다. 세계 공급량의 7%를 차지하는 러시아산 원유가 글로벌 공급망에서 빠질 것이란 우려가 번진 탓이다.
하건형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한국이 원유 의존도가 높은 원유 순 수입국이기 때문에 유가가 뛰면 원화 약세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가 급등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물가 상승)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졌고, 안전자산인 달러 '사자'를 부추겼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99선으로 올라섰다. 2020년 5월 이후 최고치다.
러시아의 국가 부도 우려도 한몫했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은 "경제 제재로 자산 일부가 동결된 러시아가 오는 16일 만기가 돌아오는 7억 달러(약 8500억원) 상당의 채권을 갚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잇달아 낮췄다. 무디스는 지난 3일부터 사흘간 러시아 등급을 '투자적격(Baa3)'에서 '투자 부적격(Ca)'으로 10단계나 강등했다. Ca는 디폴트(채무 불이행) 단계인 'C'의 직전 단계다.
외국인 투자자의 자금 유출도 원화값 하락을 부채질한 요인이다. 외국인은 환차손과 위험자산 회피 등의 이유로 국내 증시에서 돈을 빼내고 있다. 지난달 18일부터 12거래일간 국내 주식을 팔아치운 금액만 4조2000억원에 달한다. 그 여파에 8일 코스피는 1.09% 내린 2622.4에 마감, 지난 1월 27일(2614.49) 이후 가장 낮다. '대장주'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11일(6만9900원) 이후 4개월 만에 이날 종가 기준 6만원대(6만9500원)로 내려앉았다.

8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원화 환율 등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당분간 원화 가치 하락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한다. 시장이 예상하는 1차 방어선은 1250원 선이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서방의 러시아 제재로 유가가 고삐 풀린 듯이 치솟으면 당장 이번 주에 달러당 1250원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일 구두 개입에 나선 외환 당국이 환율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을 한다고 해도 흐름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다만 김효진 KB증권 이코노미스트는 "2010년 이후 유럽 재정위기, 유가 폭락, 미·중 분쟁 등 굵직한 사건 때처럼 1250원이 지지선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화값이 달러당 1300원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하건형 연구원은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에 유럽이 동참하는 경우엔 1300원에 근접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달러값 급등은 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해외 유학생을 둔 학부모나 '기러기 아빠'는 울상이다. 원화값 하락으로 1만 달러를 송금하려면 지난해 말보다 50만원가량이 더 필요하게 됐다. 유학생 자녀를 둔 A(51)씨는 "송금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이라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