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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 91%…"침공한대요" 조크 던지던 초보 대통령의 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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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에 러시아가 침공한다는군요.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모두 귀국하세요. 이날 우리는 단결해야 하니까요.”

[정글] 젤렌스키

지난달 14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월 16일 러시아 침공설’을 확인하는 듯한 말을 하자, 세계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통신사들은 러시아 침공이 임박했다며 호들갑을 떨었죠. 하지만 젤렌스키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침공설’을 시니컬하게 받아친 말이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앤마리 호던 블룸버그TV 기자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코미디언 출신답게 그냥 비꼬는 말이었는데, 번역 과정에서 맥락이 삭제됐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이 전쟁에 대해 농담을 던지다니요. 며칠 뒤 러시아가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사람들은 젤렌스키의 ‘조크’를 때와 장소도 제대로 못 가리는 초보 대통령의 정치 참사라고 여겼죠. 우크라이나 국민 상당수는 젤렌스키가 전쟁 사령관의 그릇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국제사회연구소의 지난 1월 말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민의 32%만이 젤렌스키가 전쟁 지휘관의 역량이 있다고 답했습니다(반대는 53%). 그의 재선 지지율은 23%에 불과했습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그의 측근들과 함께 ″우리는 여기 키이우에 있다″며 국민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는 모습. 젤렌스키 페이스북 캡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그의 측근들과 함께 ″우리는 여기 키이우에 있다″며 국민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는 모습. 젤렌스키 페이스북 캡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페이스북 방송을 통해 ″나는 여기 있다. 우리는 결코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라며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는 이러한 SNS 영상으로 국제 사회에 우크라이나 응원 열기를 불러일으켰고, 국민의 결전 의지를 드높였다. 그의 지지율은 90%를 넘겼다. 젤렌스키 페이스북 캡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페이스북 방송을 통해 ″나는 여기 있다. 우리는 결코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라며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는 이러한 SNS 영상으로 국제 사회에 우크라이나 응원 열기를 불러일으켰고, 국민의 결전 의지를 드높였다. 그의 지지율은 90%를 넘겼다. 젤렌스키 페이스북 캡처

그런데 웬걸 막상 전쟁이 시작되니 젤렌스키의 지지율은 쑥쑥 올라갔습니다. 지난 2월 말 우크라이나 여론조사기관 ‘레이팅스’의 조사에서 젤렌스키의 지지율은 91%로 나타났습니다(반대는 6%). 우크라이나 국민은 전쟁이 일어나자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꾼 것이죠.

대선 결선투표에서 73%라는 득표율로 당선된 젤렌스키는 왜 그동안 지지율을 갉아먹었을까요. 그리고 우크라이나 국민은 왜 그에게 다시 굳건한 지지를 보내게 된 걸까요. 우리 대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지금, 국민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 대통령 젤렌스키의 리더십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럽의 ‘부패 천국’ 우크라이나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경제와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바로 소수 재벌이 판치는 부패 경제입니다.

소련이 붕괴하고 풀려나온 거대 국영 사업체들은 당시 권력층에 기생하던 소수 경제인과 마피아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가스·석유·식료품 등 알짜 기업을 특권층이 홀랑 잡수신 거죠. 산업의 면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지고만 있어도 3대는 먹고 살 수 있는 사업입니다.

2017년 7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기업인 올렉 미하일로프(왼쪽), 알리셰르 우스마노프(오른쪽), 데니스 만투로프 산업통상부 장관(뒤쪽)과 함께 있는 모습.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는 푸틴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권을 챙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서방의 경제 제재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러시아는 부패인식지수가 유럽에서 가장 낮은 국가다. AP=연합뉴스

2017년 7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기업인 올렉 미하일로프(왼쪽), 알리셰르 우스마노프(오른쪽), 데니스 만투로프 산업통상부 장관(뒤쪽)과 함께 있는 모습.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는 푸틴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권을 챙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서방의 경제 제재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러시아는 부패인식지수가 유럽에서 가장 낮은 국가다. AP=연합뉴스

이런 구조를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я)’라고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과두 정치’로 번역됩니다. 몇 명의 권력자가 한 국가의 정치·경제를 장악하는 체제죠. 이들은 정치인을 매수하고, 마피아를 거느리며 한 나라를 쥐고 흔듭니다. 우크라이나의 부패인식지수(CPI)는 유럽에서 3번째로 낮으며 필리핀, 잠비아, 멕시코와 비슷합니다.

우크라이나 정치인은 올리가르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니, 심지어 올리가르히가 직접 정치에 뛰어듭니다.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죠. 리나트 아흐메토프는 명문 축구단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구단주이자 우크라이나 최대 재벌로 2004년 대선에서 ‘킹메이커’로 활약했습니다. ‘초콜릿 왕’이라고 불리는 과자 재벌 페트로 포로셴코는 전임 대통령이었죠.

소수가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 체제의 결과는 뭘까요. 극심한 경제난과 빈부 격차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1인당 명목 GDP(IMF, 2022)는 4960달러로 몽골(4560달러), 인도네시아(4540달러)보다 더 나을 바가 없죠.

코미디언의 대선 전략 ‘가장 정치인답지 않게’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에서 손꼽히는 인기 예능인이었습니다. 코미디언으로 데뷔했지만, 연기도 하고 대본도 쓰고 연출도 하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죠. 젊은 시절엔 성기로 피아노를 치는 낯뜨거운 슬랩스틱 코미디도 했지만, 정치를 비판하는 시사 코미디와 시트콤 연기를 자기 전공 분야로 삼아 특출난 끼를 뽐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건 2015년 방송된 ‘국민의 종’이라는 드라마였습니다. 젤렌스키는 주연을 맡아 나사 빠진 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연기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공 역사 교사가 어쩌다 상욕을 섞어가며 부패한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판했는데 이 모습을 한 학생이 폰으로 찍습니다. “우리는 두 놈 사이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어. 그중에서 덜 나쁜 놈을 택해야 한다고. 이 짓을 25년 동안이나 해 왔어.” 이 영상이 SNS에 올라가면서 엄청난 호응을 받게 됩니다. 이 교사는 졸지에 대통령에 당선돼 나라의 부패를 뿌리 뽑게 됩니다. 그는 드라마에서 푸틴도 강력히 비난했는데, 이 때문에 러시아는 이 드라마를 방영 금지 조치했죠.

2015년 방영된 우크라이나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정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장면. 욕을 섞어가며 분노를 뿜어낸 이 모습을 한 학생이 찍으면서 이름없는 교사가 대통령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스토리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됐다. 드라마 ‘국민의 종’ 캡처

2015년 방영된 우크라이나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정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장면. 욕을 섞어가며 분노를 뿜어낸 이 모습을 한 학생이 찍으면서 이름없는 교사가 대통령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스토리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됐다. 드라마 ‘국민의 종’ 캡처

드라마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젤렌스키는 2018년 드라마 이름을 딴 ‘국민의 종’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대통령 선거에 뛰어듭니다. 그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선거 전략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보여줍니다. 참신하다 못해 유치해 보이기까지 했죠. 한마디로 말하면 ‘어느 모로 봐도 기성 정치인처럼 보이지 않는 것’만 일부러 골라서 하고 다녔습니다.

사람을 모아놓고 하는 대중 연설 대신에 SNS에 익살스러운 영상을 많이 올렸습니다. 제대로 된 공약을 발표하기보다 “약속이 없으면 실망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며 유쾌하게 웃어넘겼죠.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안은 “저는 정치를 잘 모르고, 뚜렷한 정치적 견해가 없어요”라고 은근슬쩍 지나갔습니다.

물론 친러시아 반군과 교전 중인 돈바스 지역의 전쟁과, 우크라이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올리가르히의 부패 문제는 꼭 없애겠다고 했습니다. 그 외엔 정치인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쏟은 거나 마찬가지였죠. ‘기성 정치인=부패’라는 꼬리표가 붙은 우크라이나 정치판과 거리를 두기 위한 영리한 전략이었습니다.

젤렌스키는 가볍고 익살스러운 영상과 일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영상으로 선거운동을 대신했다. 지나치게 가볍다는 지적도 받았지만, 많은 국민들이 이를 신선하게 생각했고 그에게 표를 던졌다. 젤렌스키 페이스북 캡처

젤렌스키는 가볍고 익살스러운 영상과 일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영상으로 선거운동을 대신했다. 지나치게 가볍다는 지적도 받았지만, 많은 국민들이 이를 신선하게 생각했고 그에게 표를 던졌다. 젤렌스키 페이스북 캡처

그 역시 방송 재벌 이호르 콜리모이스키의 후원을 받는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콜리모이스키는 젤렌스키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드라마 ‘국민의 종’을 방영한 방송국을 소유한 올리가르히입니다. 사적으로 준군사조직을 운영하고 금융범죄에 연루된 인물입니다. 사무실에 수족관을 놓고 상어를 키우며 사람들을 불러 위협한다는 뒷골목 소문이 떠도는 인물이죠. 하지만 이런 의혹도 젤렌스키의 신선함에 마음이 뺏긴 유권자를 돌려세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결선투표에서 7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제6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정치에 염증을 느낀 우크라이나인들은 젤렌스키에게 힘을 실어줬습니다. 아마 그가 다른 정치인처럼 공적인 느낌을 주고 점잖은 체했다면 대통령이 될 일은 없었겠죠.

드라마와 다르긴 다르네… 선을 넘은 ‘신선함’

진짜로 대통령이 된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앞에 놓인 시대적 과제인 ‘전쟁’과 ‘부패’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전보다 나아진 게 없어 보였습니다.

돈바스 전쟁은 수렁으로 들어가 한 발자국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은 우크라이나 동쪽 지역인 돈바스를 놓고 한없는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 땅이니 나가라는 입장이었고, 러시아는 그쪽 주민이 원하니 독립시키라고 주장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루한스크에서 파괴된 러시아 전차 옆으로 스쿠터가 지나가고 있다. 2014년 시작된 돈바스 전쟁은 8년이 지나는 동안 해결되지 않고 국지적인 전투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루한스크에서 파괴된 러시아 전차 옆으로 스쿠터가 지나가고 있다. 2014년 시작된 돈바스 전쟁은 8년이 지나는 동안 해결되지 않고 국지적인 전투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AP=연합뉴스

젤렌스키는 2019년 5월 취임 직후 한 호흡 가다듬고 푸틴과 대화에 나섰습니다. 사실 전임 대통령 포로셴코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바짝 붙으며 푸틴과 대립했습니다. 젤렌스키는 당선되자마자 푸틴에게 전화를 걸어 우선 양국 전쟁 포로부터 석방하는 게 어떻겠냐며 조심스러운 첫 마디를 뗐습니다. 웬일로 일이 잘 풀려, 두 달 뒤 실제로 포로가 교환됐습니다.

다음엔 돈바스에 선거를 시행하고 군대를 철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어라, 이번에도 양측 군대가 조금씩 철수하기 시작했고 돈바스의 선거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국제사회도 기대감을 안고 젤렌스키의 해법을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어째 일이 너무 술술 풀려나가는 거지, 하는 불안감도 떠돌았습니다.

2019년 겨울 젤렌스키와 푸틴은 프랑스에서 마크롱 대통령, 독일 메르켈 총리와 함께 만났습니다. 젤렌스키와 푸틴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회담이었죠. 푸틴은 희망을 가졌던 우크라이나와 서방에 면전에서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철군은 없고, 우크라이나의 국경통제권도 허용하지 않겠다던 기존 입장을 고수한 거였죠. 뒤에선 상냥해 보이지만 앞에선 더 지독하게 군다, 이게 푸틴 스타일인 걸까요.

이후 돈바스의 상황은 험악해졌습니다. 전염병이 돌면서 양측의 신경도 예민해졌죠. 젤렌스키는 지난해 내내 푸틴에게 휴전을 요구했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입장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고조되는 위기 속에 젤렌스키는 미국과 서방의 든든한 지원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푸틴은 서방이 러시아 앞마당까지 넘본다면서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사를 모았고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벨라루스처럼 러시아의 위성국가 비슷하게 되는 건 국민 정서상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아니라 ‘서방’에 붙으려 했기 때문에 침공 당했다고 젤렌스키를 비판하는 건, 그가 처했던 외교 난이도를 생각해보면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젤렌스키를 비판할 여지가 더 큰 건 내정이었죠.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뒤쪽)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이 2019년 12월 9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하는 모습. 이 회담에서 푸틴과 젤렌스키는 처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푸틴은 그간 화해 국면을 완전히 뒤엎고 과거의 냉각 국면으로 상황을 되돌린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뒤쪽)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이 2019년 12월 9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하는 모습. 이 회담에서 푸틴과 젤렌스키는 처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푸틴은 그간 화해 국면을 완전히 뒤엎고 과거의 냉각 국면으로 상황을 되돌린다.

부패를 청산하겠다던 젤렌스키의 약속은 측근 인사 헛발질에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는 정치인답지 않던 대선 캠페인의 ‘신선함’을 정부 인사에까지 이어갔습니다. 측근에 정치 경험이 없는 지인들을 불러들인 거죠.

오랜 친구이자 영화제작자를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혔고, 또 다른 친구이자 방송국 경영인을 우크라이나 국정원장에 임명했습니다. 방송작가를 수석 보좌관으로 삼았고, PD를 대통령 비서실 차장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새 정치를 해보겠다는 의도였을지 모르겠지만, 회전문 인사로 대통령궁을 동아리 운영하듯 한다는 비판을 받았죠. 특히 반부패에 앞장서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던 루슬란 라보샤프카 검찰총장을 자른 것은 큰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올리가르히를 규제하는 법안의 진척도 지지부진했습니다.

전쟁 전 젤렌스키 지지율이 형편없었다?

젤렌스키가 대선에 나오면 다시 뽑겠다는 사람의 비율이 지난 1월 23%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언론이 당선 당시 73%의 득표율과 비교하며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고 하는데요. 그 비교는 좀 잘못됐습니다.

우선 우크라이나 대선은 1차 투표와 2차인 결선 투표를 치릅니다. 1차 투표에서 후보자가 과반을 얻지 못하면, 득표율이 높은 두 사람이 결선을 치르는 방식이죠. 젤렌스키가 1차 투표에서 얻은 득표율은 30%입니다. 대선엔 무려 39명의 후보자가 나섰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정당도 많은 만큼, 한 후보에 지지율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일이 드뭅니다.

1월 여론조사에서 젤렌스키가 받은 지지율은 23%지만, 이는 모든 대선후보 중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2019년 대선 득표율과 비교하면 7% 포인트가 하락한 수치입니다. 이 정도면 대중적 인기가 최근까지도 여전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언론인 올렉시 소로킨은 미국 매체 복스(Vox)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서 (20%대 지지율은) 엄청나게 인기가 좋은 것(extremely popular)”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에서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새 인물로 여겨지며 사람들은 정치인으로서 그에게 여전히 높은 기대를 품고 있다”라고도 했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일 (현지시간) 러시아군의 하르키우 민간인 마을 포격에 대해 비디오 성명을 통해 “국가 주도 테러”라고 규탄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침공 이후 야전 사령관처럼 국방색 티셔츠를 입고 미디어 앞에 선다.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지만 힘있게 국민들을 다독인다. 외신들은 젤렌스키가 오랜 세월 대중 앞에서 공연해 온 연출가이자 미디어 전문가이기에 우크라이나 국민과 세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연합뉴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일 (현지시간) 러시아군의 하르키우 민간인 마을 포격에 대해 비디오 성명을 통해 “국가 주도 테러”라고 규탄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침공 이후 야전 사령관처럼 국방색 티셔츠를 입고 미디어 앞에 선다.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지만 힘있게 국민들을 다독인다. 외신들은 젤렌스키가 오랜 세월 대중 앞에서 공연해 온 연출가이자 미디어 전문가이기에 우크라이나 국민과 세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의 침략 위기가 높아지던 올해 초 젤렌스키는 미국과 서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민을 안심시켰습니다. 침공 직전까지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던졌죠.

하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그는 돌변했습니다. 러시아 침공 전엔 체임벌린 같던 그가 전쟁이 닥치자 처칠 스타일로 바뀌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야욕을 눈감은 채 평화 협정에 매달리다가 지금까지도 비판받는 인물입니다. 체임벌린이 물러난 뒤 취임한 처칠은 히틀러와 총력을 다해 싸우자고 호소한 인물입니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침공하자 양복 대신 국방색 티셔츠를 입고 국민 앞에 섰습니다. 수도 키이우 곳곳을 누비며 라이브 방송을 하기도 했죠. 그는 “나에게 필요한 건 탈 것이 아니라 탄약”이라며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결연히 드러냈습니다.

키이우 시민 발레리 발리에프는 미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솔직히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측근은 비리로 얼룩졌고, 부패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전쟁이 터진 뒤 그는 조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 그는 영웅입니다. 그가 우크라이나에 승리를 가져다줄 것으로 믿습니다.”

까칠하게 보자면 젤렌스키는 이런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연기를 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대선 캠페인과 국정 운영 내내 자신과 정부 인사들의 모습을 잘 짜인 드라마처럼 SNS에 드러내 왔으니까요. 하지만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하는 연기라면 믿음을 걸어도 좋지 않을까요. 전쟁 직후 90% 넘게 치솟은 그의 지지율이 말해주죠.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세빛섬에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로하고 반전 메시지가 담긴 ‘평화의 빛’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캠페인은 서울시청 본관, 세빛섬, 서울로 미디어캔버스, 남산 서울타워에 파란색, 노란색 조명으로 우크라이나를 위로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표출한다. 뉴스1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세빛섬에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로하고 반전 메시지가 담긴 ‘평화의 빛’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캠페인은 서울시청 본관, 세빛섬, 서울로 미디어캔버스, 남산 서울타워에 파란색, 노란색 조명으로 우크라이나를 위로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표출한다. 뉴스1

그가 SNS에 올리는 영상들은 매일 뉴스가 돼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국제적 여론전에서 그는 명백히 승리를 거두고 있는 셈이죠. 세계 각국 정부 청사에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불이 들어오고 SNS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메시지로 가득하니 말이죠.

전쟁이 끝난 뒤 젤렌스키가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처칠이 전쟁 직후 총선에선 경제 위기 대응을 못 했다는 이유로 밀렸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에 자기 안위만을 위해 몸을 사리는 프로 정치인보다 서툴더라도 목숨 걸고 조국을 지키는 초보 정치인을 더 원한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처칠도 사실 히틀러가 발톱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성미 급하고 고집불통인, 한물간 퇴역 군인 취급을 받았죠.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도 젤렌스키가 사랑 받는 이유를 참고하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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