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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대권, 킹메이커…사라져야 할 단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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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제20대 대통령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6일 대전시 서구의 인도에 부착된 선거벽보 앞으로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 [프리랜서 김성태]

제20대 대통령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6일 대전시 서구의 인도에 부착된 선거벽보 앞으로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 [프리랜서 김성태]

이제 딱 하루 남았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래 경험하는 여덟 번의 대통령선거 중에서도 이번 대선은 참 유난합니다. 네거티브로 점철된 역대급 비호감 선거의 양태는 건전한 경쟁을 넘어 적대와 증오의 수위를 넘나드는 진영대결의 불행한 귀결일 겁니다. 선관위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되는 어이없는 사전투표 소동까지 보태졌으니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선거임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이제 어떤 후보를 뽑아야 하는지 논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겁니다. 이미 마음속 결정을 하셨을 테니까요. 대신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대권 주자, 대권 경쟁…. 5년 전 19대 대선 때까지만 해도 신문 기사에 수없이 등장하던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 기간에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대권이란 단어의 사용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금칙어로 공식 결정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왜일까요. 제왕적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이 단어가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민주공화국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이제야 비로소 체화하기 시작한 겁니다. 민주화 35년 만에 말입니다. 최근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담론도 많지만 제왕적 대통령과 민주공화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란 점을 머리가 아닌 피부로 깨닫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 하나 깨닫기까지 35년 동안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왕적 대통령 폐해 없애려면
개헌, 제도 개혁도 필요하지만
머릿속 비민주적 의식 씻어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직도 사람들은 킹메이커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립니다. 대권이란 단어의 빈도는 줄었지만 이 단어는 신문 지상에 자주 등장합니다. 언어는 의식의 표현입니다. 아직 우리 머릿속에서 대통령은 왕입니다. 그리고 언어는 다시 의식을 규정합니다. 비유적 표현일지라도 개인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킹을 프레지던트로 바꾼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을 뽑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권자인 국민의 역할입니다. 여야 정당에 권위 있는 전략가나 멘토가 있다 해도 그는 조력자일 뿐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아닙니다.

얼마 전 청와대발 뉴스에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최신 기종으로 바꾼 대통령 전용기 외면에 새긴 대한민국 국호에 용비어천가의 서체를 썼다는 겁니다. 하필이면 용비어천가입니까. 국어학자의 연구 자료라면 모를까, 대통령의 교통수단에 왕조시대의 용비어천가를 소환하는 게 온당한 일입니까. 대통령은 제왕이라는 전(前)근대적 의식의 발로 아닌가요. 언젠가 청와대 참모들과 여당 정치인들이 앞다퉈 문재인 대통령을 태종·세종에 비유했던 일이 우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지난달 15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새로운 전용기 탑승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체 외면에 새겨진 국호의 서체는 용비어천가 목판본 등의 서체를 응용한 것이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지난달 15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새로운 전용기 탑승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체 외면에 새겨진 국호의 서체는 용비어천가 목판본 등의 서체를 응용한 것이다. 연합뉴스

어떻게 하면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없애고 대권이란 단어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요. 헌법 개정을 포함한 제도 개혁이 그 해결책으로 거론됩니다. 현행 헌법을 고쳐 권력 분산과 견제 장치를 제도화하면 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선거 공약으로도 나오긴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도덕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사생결단의 싸움에서 이겨 쟁취한 권력을 스스로 줄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여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해도 야당은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개정 절차가 까다로운 경성(硬性)헌법에 속합니다.

제도 개선 또는 개혁은 민주주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필요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합니다. 민주주의의 정착은 제도에 앞서 이를 실현하는 사람의 문제고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도와 문화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관계일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사회 전반의 민주주의 토양이 단단해지면 개헌을 포함한 제도 개혁이 더 쉬워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일 투표장으로 향하는 길에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제도의 민주화가 생활 속 민주주의로 정착되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소쩍새의 울음을 필요로 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