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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배트맨이 돌아오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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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가난한 고등학생 피터 파커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기업인 브루스 웨인. 사뭇 다른 두 인물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각각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의 만화를 통해 탄생한 캐릭터이자, 각자 ‘스파이더맨’과 ‘배트맨’이라는 이름으로 악당과 맞서는 수퍼 히어로라는 점은 기본. 저마다 잔혹한 범죄에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은 인물이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통해 전 세계에 낯익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영화 시리즈의 새 출발이 잦은 캐릭터라는 점도 이제는 공통점이 될 것 같다. 새로 개봉한 ‘더 배트맨’의 로버트 패틴슨은 1989년 ‘배트맨’의 마이클 키튼, 2005년 ‘배트맨 비긴즈’의 크리스천 베일에 이어 다시 배트맨 이야기의 새 출발을 알리는 주인공이다. 앞서 두 시리즈의 전개 과정은 좀 달랐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시리즈는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호평과 함께 3부작으로 완결됐다. 반면 마이클 키튼이 시작한 ‘배트맨’은 3편 발 킬머, 4편 조지 클루니로 주연이 바뀐 데다 4편 ‘배트맨과 로빈’은 졸작이란 평가와 함께 시리즈를 막 내리게 했다.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새 영화 ‘더 배트맨’.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새 영화 ‘더 배트맨’.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스파이더맨도 기복을 겪었다. 2000년대초 토비 맥과이어가 주연한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3부작을 마친 반면 앤드류 가필드가 주연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2부로 단명했다. 곧이어 새로운 스파이더맨으로 등장한 톰 홀랜드는 다른 수퍼 히어로와 함께한 어벤져스 시리즈와 스파이더맨 자체 시리즈 모두 흥행 활약을 펼쳤다. 한국에선 2017년 1편 ‘스파이더맨:홈커밍’, 2019년 2편 ‘스파이더맨:파 프롬 홈’에 이어 코로나19로 극장가가 한껏 위축된 지난 연말 개봉한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도 700만 넘는 관객을 모았다.

로버트 패틴슨의 ‘더 배트맨’은 새로운 출발답게, 배트맨 이야기의 새로운 결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 활동한 지 이제 겨우 2년. 또 액션 영웅만 아니라 탐정 같은 면모가 두드러진다. 연쇄살인범이 남긴 암호문을 단서로 감춰진 음모를 추적한다.

여기서 실감하게 되는 것은 배트맨은 그가 나고 자란 도시, 고담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란 점이다. 스파이더맨과 달리 이 영화에서 배트맨의 상대는 먼 우주나 다른 차원에서 온 악당이 아니라 고담시의 악당이다. 배우는 다르지만 ‘다크 나이트’에서 악과 맞서기 위해 악을 자처하는 배트맨의 모습까지 본 터. 이후 스크린 밖에서는 세월이 흘렀건만 ‘더 배트맨’의 고담시는 여전히 정치인과 검찰·경찰과 범죄조직 두목이 한통속인 악의 소굴이다. 변한 게 없는 현실과 새로울 것 없는 악당들 탓인지, 극장문을 나서며 좀 우울해졌다. 어쩌면 수퍼 히어로의 활약에 더이상 큰 기대가 없는 나이가 된 탓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