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끌려간 부친, 폐병만 남아”

중앙일보

입력 2022.03.0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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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고 김종원씨 생존 모습과 사도 광산 직업능력신고수첩, 보험료영수장. 여성국 기자

고 김종원씨 생존 모습과 사도 광산 직업능력신고수첩, 보험료영수장. 여성국 기자

“아버지는 사도 광산에서 몸이 망가진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아버지가 아팠던 기억만 남아있다.”

지난 2일 충남 논산 자택에서 만난 김광선(80)씨는 부친 고(故) 김종원씨의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며 말했다. 부친이 사도 광산에 동원된 증거인 ‘직업능력신고수첩’ 등을 꺼내며 “3·1절에 찾아온 자식들을 보니 아버지가 떠올랐다”고 했다. 사도광산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피해 현장이다. 최근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미군 포로 명부 속 징용 피해자 고 장윤만씨. [사진 장현자]

미군 포로 명부 속 징용 피해자 고 장윤만씨. [사진 장현자]

김씨에 따르면 1912년생인 부친은 면 서기 등으로부터 공장 등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940년 논산에서 사도 광산으로 징용됐다.

“할머니가 ‘최씨 고집’이라 불렸는데 모친 시집살이를 모질게 시켰다. 그게 자꾸 눈에 밟혔는지 아버지는 형·누나 모친을 사도 광산으로 데려왔다. 얼마 후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다. 그렇게 나는 사도 광산에서 태어났다. 1943년쯤 진폐증이 심해진 아버지는 귀국해 다시 논산으로 돌아왔다.”

이들 가족은 어떻게 사도 광산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정혜경 박사는 “1940년 초 탈출을 시도한 징용자들이 많았다. 가족이 있으면 도망가지 않고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해 (일제는) 일부 가족들을 데려오게 해줬다”고 설명했다.

사도 광산에 강제징용된 부친 고 김종원씨의 사진을 바라보는 김광선씨. 여성국 기자

사도 광산에 강제징용된 부친 고 김종원씨의 사진을 바라보는 김광선씨. 여성국 기자

정 박사에 따르면 1943년 일본 정부는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 금 광산을 구리 광산으로 전환했다. 정 박사는 “사도에서 구리와 철이 생산됐다. 400명을 타지로 보내 전쟁을 위한 굴을 파게 했고 노동력을 상실한 이들 일부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김씨 부친이 해방 전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폐병을 얻은 김씨의 부친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돌아왔다. 김씨는 자라면서 일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을 도맡았다. 모친은 농사를 지으며 논산 강경장에서 소쿠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역사의 피해자다. 그는 “사도 광산을 문화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시달린 아픔은 외면하고 유리한 것만 보여주는 건 비겁하다. 역사를 왜곡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지역에서 강제노동과 전쟁의 참상을 담은 기록물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2일 세종시 자택에서 만난 장현자(71)씨는 부친 고(故) 장윤만(1917~1963)씨가 쓴 강제징용 수기 『태평양전쟁 실기집』을 꺼내 들었다. 장씨 부친은 1944년 경북 일대에서 징용돼 오키나와 섬 인근 아카시마에 주재한 일본군 군속으로 배치됐다.

방공호를 만들거나 굴을 파고 탄약을 옮겼다. 혹사당하면서도 자신이 겪는 현장의 참혹함을 몰래 두루마리에 기록했다. 일본군의 학대와 학살, 자살 강요 현장 등을 자세하게 적었다.

장씨의 기억 속 아버지는 항상 배를 잡고 병석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강제동원 후유증으로 잦은 병치레를 했다. 부친의 기록에는 “밥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호소한 내용이 많았다. 장씨는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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