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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 순식간 200m 날아갔다" 이젠 도심도 위험하다 [르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불씨, 200m 떨어진 산으로 날아가 순식간에 확산”

지난 6일 오전 강원 동해시 묵호동 주변 건물들이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잿더미로 변한 모습. 박진호 기자

지난 6일 오전 강원 동해시 묵호동 주변 건물들이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잿더미로 변한 모습. 박진호 기자

7일 오후 강원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 최초 산불이 발생한 주변 지역의 낙엽을 밟자 ‘바스락’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올해 겨울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아 바닥이 바짝 마른 상태여서다. 이곳에서는 지난 5일 오전 1시8분쯤 인근 마을 한 주택에서 발생한 불이 산으로 옮겨붙더니 불씨가 강한 바람을 타고 동해시까지 번져 나갔다.

불과 함께 연기, 재가 동해시 도심을 뒤덮자 시민들이 긴급 대피했다. 주택 등 건축물 71동이 전소하고 25동이 일부 소실됐다. 앞서 지난 4일 오전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발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불 역시 강원 삼척까지 번져 1만2695㏊의 피해를 냈다. 당시 불은 민가는 물론 울진 한울원전과 삼척 LNG 생산기지까지 위협했다. 동해 묵호동에 사는 조영제(67)씨는 “불씨가 도깨비불처럼 주택가 곳곳으로 날아들어 주민들 대부분이 대피하기 바빴다”고 말했다.

불씨와 연기, 재 날리자 도심 ‘아수라장’

지난 6일 강원 강릉시 옥계면 산불 피해 현장에서 경찰과 행정당국이 산불 원인 조사 등을 하고 있다. [사진 강릉시]

지난 6일 강원 강릉시 옥계면 산불 피해 현장에서 경찰과 행정당국이 산불 원인 조사 등을 하고 있다. [사진 강릉시]

강릉에서 시작된 산불로 강원 동해시 만우마을이 지난 6일 폭격을 맞은 듯 초토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릉에서 시작된 산불로 강원 동해시 만우마을이 지난 6일 폭격을 맞은 듯 초토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전국적으로 산불의 규모가 커지면서 산림은 물론이고 도심 주택가나 주요시설까지 위협하고 있다. 3년 전인 2019년 4월 4~5일 발생한 고성·속초, 강릉·동해 산불 역시 기존 산불과는 달리 도심까지 불길이 덮쳤다. 당시 고성·속초는 1227㏊ 산림과 건축물 879동이, 강릉·동해는 1260㏊와 건축물 277동이 피해를 봤다. 당시 4개 지역이 아수라장이 되면서 2명이 숨지고 12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기후변화 영향 등의 여파로 산불 발생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행정안전부 집계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5일까지 발생한 산불은 모두 245건으로, 지난해 동기(126건)보다 94.4% 증가했다. 최근 3년(2019~2021년) 평균인 135건과 비교해도 87.7% 늘어났다.

이에 시민사회단체 등은 산불과 관련한 항구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녹색연합은 지난 6일 보도자료를 통해 “국가적 재난인 산불 대응을 기후위기 적응 차원의 대책으로 재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녹색연합은 또 “미국과 호주의 대형산불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며 “겨울과 봄철 건조가 심각한 상황에서 대형산불의 위협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빨라지는 ‘산불 시계’…겨울철 고온건조 영향

지난 4일 강릉시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확산하면서 큰 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5일 밤 동해시 대진동까지 번진 산불이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4일 강릉시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확산하면서 큰 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5일 밤 동해시 대진동까지 번진 산불이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연합뉴스]

전문가들도 기후변화 영향으로 이른바 ‘산불 시계(산불이 나는 시기)’가 빨라진다는 분석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권춘근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겨울철 온도가 지속적으로 올라가는 반면 습도는 낮아져 낙엽이 바짝 마르는 등 불이 나기 좋은 조건이 됐다”며 “여기에 해마다 강원도에는 2월에 눈이 내려 3월까지 산불 예방 효과가 있었는데 올해는 눈이나 비가 거의 오지 않은 점도 대형 산불의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충국 기후변화연구원 센터장은 “매년 산불이 나고 있어서 올해 산불만을 기후변화 증거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면서도 “장기적으론 기후변화가 대형산불을 부추길 확률이 높은 만큼 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상청은 잦은 산불의 원인으로 ‘겨울 가뭄’을 꼽았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강수량은 1973년 관측 이래 최저치인 13.3㎜로 집계됐다. 강수량이 평년(89.0㎜) 수준을 크게 밑도는 가운데 산불 발생 후 강하게 분 건조한 바람도 산불을 키우는 데 한몫을 했다. 산불 발생 당시 일부 지역에선 초속 20m에 달하는 강풍이 불기도 했다. 작은 불이 대형화재로 번질 수 있는 악조건을 모두 갖췄던 셈이다.

“건조한 날씨 대형 산불 위협 계속될 것”

숲 가꾸기 사업 이미지.

숲 가꾸기 사업 이미지.

숲 가꾸기 사업 이미지.

숲 가꾸기 사업 이미지.

매년 동해안 지역에 부는 지형성 바람도 산불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해안은 봄철 ‘양간지풍(襄杆之風)’ 또는 ‘양강지풍’(襄江之風)이라고 불리는 강풍으로 인해 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한다. 양간지풍은 양양과 간성, 양강지풍은 양양과 강릉 사이에 부는 국지적 강풍을 말한다. 고온 건조한 데다 소형 태풍급에 버금갈 정도로 풍속도 빠르다. 국지성 강풍은 봄철 ‘남고북저’ 기압배치에서 서풍기류가 형성될 때 발생한다. 한반도 남쪽 고기압과 북쪽 저기압 사이 강한 서풍이 밀려와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에 더 건조한 바람이 부는 현상이다.

이러한 강한 바람에 불똥이 날아가 새로운 산불을 만드는 ‘비화(飛火)’ 현상도 대형화의 원인이다. 산불 목격자들이 “불씨가 ‘도깨비불’처럼 산을 넘어 날아다닌다”고 말할 정도로 진화에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산림과학원에 따르면 산불의 64%는 발화지점에서 100m 이내에서 수관화(樹冠火)로 이어진다. 수관화란 나무의 가지나 잎이 무성한 부분만을 태우며 빠르게 지나가는 산불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산불의 수관화가 진행되기 전 산불 발생지점 100m 이내에서 신속하게 진화해야 대형 산불을 막을 수 있다.

산림 복원 시 ‘내화 수림대’ 조성 필수

내화수림대 조성 사업 이미지.

내화수림대 조성 사업 이미지.

전문가들은 산불 사전예방과 함께 피해 저감을 위한 ‘숲 가꾸기’와 ‘내화수림’ 조성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기후변화로 매년 산불의 규모가 커지고, 특정 시기가 아닌 연중화되는 추세에 맞춰 산림을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숲 가꾸기는 솎아베기, 가지치기, 산물수집 등을 통해 비화 현상을 막기 위한 조치다. 무성한 가지나 잎을 최소화함으로써 산림 내 연료물질을 줄일 경우 수관화로 진행되던 산불이 지표화로 축소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내화수림 조성은 애초부터 불에 강한 수종을 식재해 산불 확산 가능성을 낮추는 작업이다. 산불의 특성을 반영해 6부 능선부터 9부 능선까지 띠 형태로 산불에 강한 나무를 심어 숲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대표적인 내화수목은 굴참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떡갈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꼽힌다. 각종 주요시설물 주변에 대한 조경 시에는 최대 10m 이상의 완충지대를 조성한 뒤 내화수를 심는 방식 등도 거론된다.

강원석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태연구과 박사는 “산불이 발생한 지역은 특성상 또다시 불이 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복원할 때부터 내화수림을 구축하는 개념이 적용돼야 한다”며 “산불이 주로 발생하는 능선 등 주요지점에 불에 강한 수종을 심어 확산 속도를 늦추면 대형산불을 막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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