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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망가져 고국 땅 밟은 내 아버지는 사도 광산 징용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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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사도 광산에서 몸이 망가진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아버지가 아팠던 기억만 남아있다."

지난 2일 충남 논산 자택에서 만난 김광선(80)씨는 부친 고(故) 김종원씨의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며 말했다. 부친이 사도 광산에 동원된 증거인 '직업능력신고수첩' 등을 꺼내며 "3·1절에 찾아온 자녀들을 보니 아버지가 떠올랐다"고 했다.

사도 광산에 강제징용된 부친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바라보는 김광선(80)씨. 여성국 기자

사도 광산에 강제징용된 부친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바라보는 김광선(80)씨. 여성국 기자

금광서 일하다 진폐증 "건강 잃고 귀국"

김씨에 따르면 1912년생인 부친은 면 서기 등으로부터 공장 등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940년 논산에서 사도 광산으로 징용됐다.
"할머니가 '최씨 고집'이라 불렸는데 모친 시집살이를 모질게 시켰다. 그게 자꾸 눈에 밟혔는지 아버지는 형·누나 모친을 사도 광산으로 데려왔다. 얼마 후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다. 그렇게 나는 사도 광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쯤 진폐증이 심해진 아버지는 귀국해 다시 논산으로 돌아왔다."

 고 김종원씨의 젊은 시절 사진. 여성국 기자

고 김종원씨의 젊은 시절 사진. 여성국 기자

이들 가족은 어떻게 사도 광산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정혜경 박사는 "1940년 초 탈출을 시도한 징용자들이 많았다. 가족이 있으면 도망가지 않고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해 (일제는) 일부 가족들을 데려오게 해줬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노동자가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1943년 일본 정부는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 금 광산을 구리 광산으로 전환했다. 정 박사는 "사도에서 구리와 철이 생산됐다. 400명을 타지로 보내 전쟁을 위한 굴을 파게 했고 노동력을 상실한 이들 일부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김씨 부친이 해방 전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폐병을 얻은 김씨의 부친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해 돌아왔다.

1시간 반 산행 출근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김씨 부친과 같은 해, 같은 지역에서 동원된 고 임태호씨의 구술 기록에도 사도 광산의 참상이 녹아있다. 사도 섬 오지 정상에 숙소가 있어 징용자들은 매일 1시간 30분 산길을 등반해 작업장에 갔다고 한다.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겨울 출근길이 더 고됐다.

고 김종원씨의 사도 광산 '직업능력신고수첩'과 '보험료영수장'. 김씨는 "부친이 우편급여통장도 갖고 있었으나 귀국 후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고 했다. 여성국 기자

고 김종원씨의 사도 광산 '직업능력신고수첩'과 '보험료영수장'. 김씨는 "부친이 우편급여통장도 갖고 있었으나 귀국 후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고 했다. 여성국 기자

지하 광석 채굴을 한 임씨의 현장에선 매일 낙반 사고가 일어났다. "오늘은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매일 마음 졸이던 그도 발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한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겠다고 느낀 그는 탈출을 감행해 히로시마에 도착한다. 임씨는 "진정한 사죄를 받기 원한다"는 말을 남겼지만 1997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김씨는 자라면서 일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을 도맡았다. 모친은 농사를 지으며 논산 강경장에서 소쿠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김씨는 "나는 초등학교만 나온 뒤 생계를 위해 악착같이 일해 3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며 "아픈 부친이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피해자 아닌가"라고 했다.

"사도 광산, 한국인 아픔 외면하는 건 역사 왜곡" 

현재의 사도 광산 모습. [중앙포토]

현재의 사도 광산 모습. [중앙포토]

김씨는 "일본이 사도 광산을 문화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시달린 아픔은 외면하고 유리한 것만 보여주는 건 비겁하다. 역사를 왜곡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2019년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국립공문서관에는 사도 광산 관련 조선인 1140명의 미지급 임금을 공탁한 기록이 남아있다. 정 박사는 관련 자료들을 종합해 최소 1519명의 조선인이 동원됐다고 추정한다. 앞서 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는 148명을 사도 광산 피해자로 판정했다. 이 중 9명은 현지에서 사망했고 73명은 진폐증 등의 후유증을 신고했다.

"오키나와 징용된 아버지, 죽을 고비 겪었다"

"아버지가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참혹한 전쟁터에서 어떻게 일기를 써서 가지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일본군의 만행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신념이 있으셨던 것 같다."

사도 광산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지역에서 강제노동과 전쟁의 참상을 담은 기록물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2일 세종시 자택에서 만난 장현자(71)씨는 부친 고(故) 장윤만(1917~1963)씨가 쓴 강제징용 수기『태평양전쟁 실기집』을 꺼내 들었다. 장씨 부친은 1944년 경북 일대에서 징용돼 오키나와 섬 인근 아카시마에 주재한 일본군 군속으로 배치됐다.

강제징용 피해자 고(故) 장윤만씨의 유족 장현자(71)씨가 2일 세종시 자택에서 부친의 강제징용 경험이 담긴 『태평양전쟁 실기집』을 보이고 있다. 이영근 기자

강제징용 피해자 고(故) 장윤만씨의 유족 장현자(71)씨가 2일 세종시 자택에서 부친의 강제징용 경험이 담긴 『태평양전쟁 실기집』을 보이고 있다. 이영근 기자

방공호를 만들거나 굴을 파고 탄약을 옮겼다. 혹사당하면서도 자신이 겪는 현장의 참혹함을 몰래 두루마리에 기록했다. 일본군의 학대와 학살, 자살 강요 현장 등을 자세하게 적었다. 다음 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에게 체포돼 포로로 지내다 1946년 송환됐다. 귀향 후 동생에게 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강제동원 후유증으로 위장병…45세 사망"  

장씨의 기억 속 아버지는 항상 배를 잡고 병석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강제동원 후유증으로 위장에 문제가 생겨 잦은 병치레를 했다. 부친의 기록에는 "밥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굶주림을 호소한 내용이 많았다. 장씨가 어린 시절, 부친은 마흔다섯에 위장병으로 사망했다. 장씨 어머니는 남편이 그리울 때면 남편의 글을 읽으며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1945년 미군의 포로 명부에 강제징용 피해자 고(故) 장윤만씨의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왼쪽) 국가기록원 (오른쪽) 장윤만씨의 생전 사진. 유족 장현자씨 제공

1945년 미군의 포로 명부에 강제징용 피해자 고(故) 장윤만씨의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왼쪽) 국가기록원 (오른쪽) 장윤만씨의 생전 사진. 유족 장현자씨 제공

『태평양전쟁 실기집』은 장씨가 1944년 6월 태평양전쟁에 징병 돼 끌려간 후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미군 포로가 되기 직전까지 1년간 체험한 것을 기록한 수기다. 부친의 기록이 세상에 나온 건 우연한 계기였다. 2019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들은 1977년 반도상사(LG상사 전신) 노조 여성지부장 출신인 장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자택에 방문했다가 강제징용자인 부친의 기록을 알게 됐다. 학예사들의 출간 제안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지원으로 책이 세상에 나왔다.

2002년 노동운동 역사를 기록한 『그때 우리들은』을 출간한 장씨는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최근 사도 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려는 일본 정부에 대해 "강제징용의 역사를 지우려는 행위"라면서도 "일본에도 징용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학자와 시민들이 있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도 광산이 주목받으면서 장씨는 코로나 19 이후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하나 추가됐다고 한다. "TV로만 봐도 마음이 아팠던 오키나와에 꼭 가보고 싶다. 아버지가 징용된 현장을 가서 기억하고 알려야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인터뷰 도움 주신 곳-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고 장윤만씨의 『태평양전쟁 실기집』내용 일부

『태평양전쟁 실기집』(원제: 대동아전쟁 실기집) 표지(왼쪽)와 본문(오른쪽). 본문 첫 제목은 '왜정시대 징용 거귀 고생기'라고 적혀 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

『태평양전쟁 실기집』(원제: 대동아전쟁 실기집) 표지(왼쪽)와 본문(오른쪽). 본문 첫 제목은 '왜정시대 징용 거귀 고생기'라고 적혀 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

"따뜻한 우리 고향 부모 처자 여기 두고 나만 홀로 간단 말인가. 원수로다 원수로다."
고향을 떠나는 기차역에서 장씨는 안타까운 심정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부산을 떠나 오키나와로 향하는 배에서 갈증과 답답함을 호소하는 조선인에게 "죽어도 좋다. 나가면 뒤진다"는 말이 돌아왔다고 썼다.

고향을 떠난 지 13일 만에 오키나와에 도착한 장씨는 '가미카제(神風)' 자살 보트를 해안가 굴에 숨기거나 꺼내 출동을 지원하는 작업에 동원됐다. 굴 앞에선 미군이 총을 쐈고, 굴에서 도망가면 일본군의 총알이 날아왔다.

"울며불며 수류탄을 손에 들고 심지에 불을 달아 30분 동안 있으니 폭탄이 폭발하며 7~8명 중 두 사람은 육신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머지 사람은 정신없이 쓰러졌다"는 조선인이 고통 끝에 극단적 선택을 기도하는 대목도 나온다. 굶어 죽는 동료도 있었다. "하루는 출석을 부르는데 한 사람이 답이 없어 툭 쳐보니 배고파 굶어 죽어있다. 우리 동포 한 굴속에서 죽어도 모르고 있으니 목숨만 살았지 어찌 살았다 하리요."

일본군의 학살도 기록돼 있다. 일본군은 조선인을 6명을 학살한 뒤 장씨에게 '구덩이에 파묻으라'며 뒤처리를 맡겼다. "명령을 못 이겨 혼자 가서 묻고 나니 살아서 흙이 들썩들썩하니 독한 놈의 왜졸이 빨리 묻으라고 소리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따르면 오키나와 지역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1만명 내외로 추산된다. 장씨 부친의 기록을 감수한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평범한 농민이 겪은 일본식민통치의 실상을 절절히 전하고 있다. 일본군이 군속들의 투항을 방지하기 위한 감시, 감금, 학대, 살육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매우 희귀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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