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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식·자유 무료로 드립니다"···푸틴에 복수하는 유럽인의 방식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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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접경지 프셰미실에서 수도 바르샤바로 향하는 77번 고속도로에는 유독 UA(우크라이나 약자) 번호판을 단 차들이 많았다. 10대에 2~3대가량이었다. 폴란드 서쪽 국경을 통해 독일·체코 등으로 빠져나가려는 차량이었다. 속도를 늦춰 곁눈질로 보니 차 안에는 대형 트렁크, 담요, 생수 등이 빈틈없이 실려 있었다. 한결같이 피곤해 보였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주유소에 한 차량 당 주유 한도를 50리터로 제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주유소에 한 차량 당 주유 한도를 50리터로 제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5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바르샤바 시내 러시아 대사관 인근에선 우크라이나 국기와 유럽연합(EU) 국기를 나란히 든 젊은이들이 "우크라이나"를 연호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문화시설과 레스토랑 곳곳도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주유소에는 한 사람 당 50리터만 기름을 판다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시내에서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시내에서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공항도 난리였다. 4일 새벽(현지시각)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단지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러시아 영공 항로 항공편들은 거의 모두 결항됐다. 어떻게든 남쪽 항로를 통해 폴란드를 빠져나가려는 승객들로 바르샤바 공항은 북새통이었다. 이날 오전 출국장에서 만난 한 40대 프랑스인은 "귀국 일정을 하루 앞당겼다"고 말했다. 국경에서 500㎞ 가까이 떨어진 이곳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졌다.

폴란드 바르샤바 시내의 한 공연장에 폴란드 국기와 우크라이나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폴란드 바르샤바 시내의 한 공연장에 폴란드 국기와 우크라이나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경유지로 들른 두바이 공항에는 러시아를 빠져나온 승객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한 종합상사 모스크바 주재원 일행이라는 일본인 4명은 "모스크바에 계엄령이 내려질 가능성이 있고 경제가 사실상 마비되면서 당분간 귀국해 있기로 했다"며 "모스크바~일본 직항편도 이미 모두 폐쇄됐다"고 전했다. 한 직원은 "러시아 내 여론조사를 보면 약 60%는 이번 위기가 서방국가 탓이라 생각하고, 푸틴 탓으로 보는 국민은 4%에 불과하다"며 "다만 전쟁이 장기화해 사망자 수가 늘고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이 가속되면 푸틴 실각 등 의외의 사태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폴란드 메디카 국경 검문소로 걸어 내려오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우크라이나 방향의 어두운 구름과 폴란드 방향의 파란 하늘이 대조적이었다. 메디카 국경검문소=김현기 순회특파원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폴란드 메디카 국경 검문소로 걸어 내려오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우크라이나 방향의 어두운 구름과 폴란드 방향의 파란 하늘이 대조적이었다. 메디카 국경검문소=김현기 순회특파원

다소 늦었지만 '전쟁 발발'에 대한 아쉬움, 다소 이르지만 '전쟁 후'에 대한 우려도 취재 기간 내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침공의 이유로 든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놓고는 유럽 국가 간에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좀 더 일찍 '중립적 지위 부여' 같은 단계적·현실적 절충안을 모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지적들이 많았다.

폴란드 프셰미실 시내에서 국경인 코르초바 방향으로 가는 고속도로. 김현기 순회특파원

폴란드 프셰미실 시내에서 국경인 코르초바 방향으로 가는 고속도로. 김현기 순회특파원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5일 예고 없이 폴란드 코르초바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 영토를 밟았다. 그리곤 "내가 지금 우크라이나(땅)에서 내 친구(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내 동료와 서 있는 것처럼 전 세계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 대응에 올인하느라 유럽에선 한 발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도 못하게 됐다. 외교력 분산이 불가피해졌다. 한편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며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자는 중국이 될 공산이 크다는 느낌이다. 3일 베이징에서 열린 패럴림픽 개막식의 파슨스 IPC(국제패럴림픽위원회)위원장의 평화 발언이 중계되다 끊긴 배경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우크라-폴란드 접경을 가다 ⑥·끝

지난 1주일 30~40시간 이상 걸어서 혹은 열차 편으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목숨을 걸고 넘어온 많은 피란민을 접했다. 어떤 이들은 조국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기자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어떤 이들은 침략 전쟁을 일으킨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독하게 저주했다. 하지만 공통으로 그들이 한 이야기는 "우리와 같이 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이었다. 평화와 자유,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에는 국경이 없었다. 수백㎞를 운전하고 와 열차에서 내린 피란민들에게 수프를 배식하던 컴퓨터공학 과학자 카밀, "난 당신에게 먹을 것과 잘 곳과 자유를 무료로 드리고 싶습니다"란 팻말을 들고 추위도 마다치 않던 이탈리아인, 피난민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자 지갑을 열던 일본인 기자…, 모두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마음은 모두 하나였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심가의 문화과학궁전. 구 소련 시절 스탈린의 소련 건축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그 주변으로 새로 지은 신축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바르샤바=김현기 순회특파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심가의 문화과학궁전. 구 소련 시절 스탈린의 소련 건축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그 주변으로 새로 지은 신축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바르샤바=김현기 순회특파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5일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부과한 경제제재는 러시아에 대한 공격, 선전포고와 같다"고 말했다. 전쟁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누가 일으켰는지, 왜 일으켰는지 모두 잊은 채 한다. 딱 그 모습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폴란드인들은 구소련이 바르샤바에 공산주의 사상을 심어주기 위해 건설한 230m 높이의 '문화과학궁전'을 부수지 않고 대신 주변에 높은 건물을 차곡차곡 세워나가는 방식으로 가려 나간다고 한다. 전쟁을 일으킨 자에 똑같이 무력으로 보복하진 못하더라도 국제사회가 하나로 뭉쳐 그 대가를 치르게 할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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