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어령(1934~2022) 선생은 지난해 “내년 3월에는 내가 세상에 없을 것 같아”라고 예고했다. 3월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고, 그는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인문학에서부터 자연과학·예술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최전선에서 전력투구한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부재(不在 )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1956년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을 혹독하게 비판한 평론 『우상의 파괴』, 63년 한국적 정서의 심층을 탐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60년대 후반 시인 김수영과 벌인 ‘불온시 논쟁’, 전쟁과 빈곤의 나라 한국을 독자적 문화를 가진 문명국으로 각인시킨 88 서울 올림픽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 이론의 ‘낯설게 하기’를 문화행정에 적용한 파격, 세계 최초로 발상해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에 적용한 디지로그(Digilog),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오기도 전에 던진 생명자본이라는 거대한 화두(話頭)….

죽은 지식인 사회 이방인 이어령
농경사회 의식 근대로 이끈 거인
진영에 서지 않고 인간·문명 지켜
영혼 없는 지식 군상 부끄러울 뿐

클리셰(cliché·진부함)를 거부하고 당대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질풍노도의 아방가르드 역사였다. 이어령은 한국이 농경사회의 낙후된 의식을 극복하고 근대성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가장 빠르게 산업화·민주화·정보화로 시선을 돌리도록 한 선구자였다.

그가 세상과 작별하기 22일 전인 2월  4일 통화했다. 중앙일보에서 인연을 맺은 스승과 제자의 생애 마지막 대화였고, 비통한 순간이었다. 늘 어린아이의 호기심으로 무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옥타브 높은 명징한 목소리로 상대를 각성시켰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꺼져 가는 촛불처럼 희미한 목소리였다. “몸이 아파져서 그동안 연락도 못하고…. 새 책이 나왔어. 보내줄게.”

그는 “철창을 나온 호랑이”로 표현했던 ‘나의 죽음’이 덤벼들자 기록자에게 “나를 박제화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과거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인간의 꿈틀거리는 현재의 언어와 행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이어령이 살아낸 삶은 그가 쉴 새 없이 진화하는 사유, 용기 있는 실천으로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문학과 문화, 문명의 도성(都城)을 건설한 거인(巨人)이었음을 입증한다.

그는 “우리는 불을 지르지 않고는 씨를 뿌릴 수 없는 화전민”이라고 믿었다. 날카로운 ‘불의 언어’로 기성의 억압에 맞선 이유다. 세계사적 보편성을 들이대며 정치와 사법의 시대착오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아직 20대이던 1960년 3월 ‘새벽’ 편집장으로 이승만·이기붕의 독재에 저항하는 지성인들의 지상 데모를 주도했다. ‘사회 참여란 무엇인가’ ‘잠자는 거인’이라는 권두 논문을 썼다. 4·19혁명 직후 한국 사회는 정치 만능의 시대였지만 그는 지체없이 정치에서 퇴각해 본업으로 복귀했다. 문학은 권력과 정치 이념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힘이라고 믿었다. 김수영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1967년 『분지(糞地)』의 작가 남정현이 북한 찬양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검사가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엄청난 용공성에 놀랐는데 증인은 놀라지 않았나”고 다그쳤다. 이어령은 “병풍 속의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분지』는 소설이지 신문 기사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검사는 징역 7년을 구형했지만 이어령에게 설득된 판사는 선고유예로 풀어줬다. 1975년 한승헌 변호사가 『어떤 조사(弔辭)』를 써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을 때도 감정인 자격으로 그를 옹호했다.

작가 조정래가 소설 『태백산맥』을 쓴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을 때 아무도 모르게 구명(救命)하고, 중국으로의 출국이 막혔을 때 신원보증을 해 준 사람도 이어령이었다. 보수인 노태우 대통령이 만든 문화부의 초대 장관(1990~1991)은 문화의 우산으로 약자인 진보를 보호한 휴머니스트였다.

정작 본인은 어느 진영에도 속하기를 거부했다. 스스로의 사단도 만들지 않았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비판 때문에 ‘붓 깡패’로 불렸고, 모교인 서울대에서도 안티의 대상이었다. 늘 외로운 단독자(單獨者)였다. 그는 올해 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항상 다수보다는 소수에 속한 사람이었다. (중략) 그래서 외로웠네.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는 스스로 진영에 포박되고, 권력의 양지를 향해 몰려다니는 지식 군상(群像)을 꾸짖었다. “기회주의자는 많다. 진보인데 우클릭하고 보수인데 좌클릭하는 사람들, 인기에 영합해 정치 활동을 시작한 사람들 말이다. 정치 밖에서 정치를 객관화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이어령은 죽은 지식인의 사회를 박차고 나온 자발적 에트랑제였다. 인간과 문명의 존엄성을 지켜 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 글이 증명한다”고 선언했다. 지금 영혼 없는 지식인들은 정치인과 손을 잡고 증오를 선동하고 있다. 이어령은 “‘우리(we)’라는 ‘우리(cage)’에 갇혀 버리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이어령 80년 생각』  김민희). 이 끝없는 흔들림의 계절에서 외로움을 선택했던 그의 절제가 눈물겹다.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