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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서윤은 고발한다

'전쟁 일상' 항의하자 진상 취급한 한국…필리핀은 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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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서윤 더불어민주당 전 청년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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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 그래픽=김영옥 기자

지난해 12월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 그래픽=김영옥 기자

지난해 12월 6일부터 지난 2월 24일까지, 총 21번의 출근 시간마다 지하철을 멈추게 했던 사람들이 있다. 장애인이다. 2001년 1월 22일 서울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건 이후 20년간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외쳐왔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출근길 지하철 시위'라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잠깐의 관심을 지나 비난과 혐오로 이어졌다. "시민에 불편을 끼친다"는 불만은 그나마 점잖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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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평생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단 한 번도 안 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고. 출근 시간 잠깐의 불편도 참지 못하는데 이들은 무려 20년을 겪었다, 아니, 그 이전엔 감히 요구할 생각조차 못 했고 평생을 이동하기 불편한 스스로를 탓하며 집 안에 갇혀 지낸 게 장애인들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지난달 23일 서울 지하철 4호선 서울역에서 열린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참석했다. [사진 정의당]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지난달 23일 서울 지하철 4호선 서울역에서 열린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참석했다. [사진 정의당]

오이도역 사건 후 설치된 지하철 역사 엘리베이터는 장애인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됐다. 백발 어르신과 걸음 느린 임산부, 외출 나온 유아차, 큰 캐리어를 든 여행객, 그리고 짐수레를 든 사람들 모두가 함께 사용한다. 나는 다시 묻는다. “지금 타고 있는 그 엘리베이터를 장애인들의 피땀으로 만들었다는 걸 아느냐"고. "지금 자전거나 킥보드를 인도 위아래를 오가며 탈 수 있게 턱을 없앤 게 장애인이라는 걸 아느냐"고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이유? 나 역시 26년간 휠체어 생활을 한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타게 된 휠체어…필리핀으로 떠나다

나 홍서윤이 살아온 인생은 높고 낮은 산을 무수히 마주하는 등산객의 삶과 비슷했다. 때로는 낮은 산을 마주할 때도, 때로는 높은 산을 마주할 때도, 또 어떤 날은 능선 위에 펼쳐진 넓은 평지를 마음껏 내달릴 때도 있었다. 산에서 마주하는 새로움과 신비로움은 경험 없이는 감히 어디에 비유할 수 없다. 고통을 견디고 등산의 마침표를 찍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경험이어서다. 산에 내 인생을 대입한 건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내 인생의 궤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초등학생 때인 1995년 7월 25일, 여름방학을 맞아 수영강습을 갔다. 그 날 수영장 물속에서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다음 다시는 자력으로 일어나 걷지 못하게 됐다. 몇 년을 원인도, 병명도 모른 채 살아가다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알게 된 불운의 이름은 ‘바이러스성 척수염’이었다. 사고가 난 그 날, 그리고 내 장애의 이름을 알게 된 그 날은 일분일초가 전부 생생히 기억난다.

휠체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학교 가기였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 한국 공립 학교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지금은 흔한 경사로조차 없었다. 휠체어 탄 학생이라는 존재는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 그리고 교사에게도 매우 난감한 일이었다. 남은 초등학교 수업일수는 최저일수만 겨우 채웠다. 부모님이 나를 업고 2층, 3층에 있는 교실로 데려다주었지만 매일은 무리였다.

졸업 후 집에서 5분 거리 중학교를 배정받았지만, 그 학교는 휠체어 탄 입학생 홍서윤을 거부했다. 휠체어 타는 학생은 받을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부모님은 사비를 털어서라도 휠체어 이동이 가능하도록 할 테니 교실을 1층으로만 배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아버지 사업을 빌미로, 실은 내 등교를 위해, 가족 모두 필리핀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유럽이면 모를까 왜 필리핀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한국보다 여건이 더 나쁠 거라는 막연한 편견 탓이다. 하지만 아니다. 거긴 달랐다. 물론 일반 공립학교가 아닌 외국인학교였지만 어쨌든 난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아무 문제 없이 다녔다. 장애인 학생이라고 아무도 ‘깍두기’ 취급하지 않았다. 모든 수업은 휠체어 탄 학생도 함께 참여한다는 기본 원칙이 있었고, 학교생활 동안 어떤 배제도 경험해 본 기억이 없다. 축구수업을 할 때는 직접 공을 차지는 않아도 운동장 우측에서 깃발을 들고 오프사이드 신호를 주는 몫을 다 했다. 축구뿐 아니라 체육수업도 모두 다 출석했다. 연말 합창단 공연도 함께했다. 친구들이 휠체어를 들어 무대에 올랐다. 공연 후 쏟아지는 갈채와 기립박수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장애인 학생이 처음 졸업한다는 이 학교는 졸업식 무대에 경사로를 설치했다.

홍서윤 청년대변인의 필리핀 유학시절. 휠체어에 앉은 이가 홍 대변인이다. [사진 홍서윤]

홍서윤 청년대변인의 필리핀 유학시절. 휠체어에 앉은 이가 홍 대변인이다. [사진 홍서윤]

그리고 졸업을 앞둔 고3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교장실로 호출했다. 그곳에는 중학교 입학을 앞둔 여자아이 한 명과 부모가 있었다. 나보다 훨씬 장애가 심한, 휠체어 탄 친구였다. 아이의 부모는 반갑게 인사했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가리키며 "참 훌륭한 학생이다. 또 다른 훌륭한 학생이 입학하기 바란다"라고 했다. 딱히 설명은 없었지만 교장 선생님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왔다. 6년이나 지났지만 한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장애인에 대한 불편한 시선들로 중학교 입학 전 겪었던 괴로운 시간을 또 보내야 했다. 1년은 은둔 청년이 돼 게임만 하며 허송세월했다. 삶이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대입을 준비했다. 수개월 노력 끝에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엘리베이터 없는 강의실이 배정될 때마다 교무처에서 실랑이를 벌이느라 매 학기가 전쟁이었다. 늘 같은 말이었다. "학생 한 명 때문에 강의실을 옮겨 줄 수 없다. 이번엔 수강하지 마라. " 무심한 교직원의 태도에 나는 진상 학생이 됐다.

KBS의 제 2기 장애인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당시. [KBS 뉴스 캡처]

KBS의 제 2기 장애인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당시. [KBS 뉴스 캡처]

그런데도 배움에 대한 욕심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과정 중 KBS 장애인 앵커에 합격해 예상에 없던 인생 경로 변경이 시작됐다. ‘대한민국 1호 여성 장애인 앵커’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로 KBS 12 뉴스의 생활뉴스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타이틀의 무게가 무거워 매일 밤낮없이 연습했다. 돌이켜보면 생방송에서 웃지 못할 실수도 꽤 저질렀다. 장애인 앵커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 도전 정신 하나로 시작한 ‘나 홀로 유럽여행’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우리나라에도 접근 가능한 관광(Accessible Tourism), 혹은 무(無)장애 관광(Barrier-free Tourism) 패러다임을 안착시키기 위해 수년간 현장에서 활동했다. 나의 작은 시도가 장애인·노인 등에 꼭 필요한 편의시설을 갖춘 관광지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다고 믿는다.

여성·청년·장애인이라는 정체성에 맞는 당사자 정치 

삶에서 느끼는 갈증은 제도 변화를 통해서만 바꿀 수 있는 게 많았다. 다시 말해 개인으로선 늘 한계에 부딪혔다. 그래서 2015년 말 시작한 게 정당 활동이다. 여성·청년·장애인이라는 내 정체성에 맞는 당사자 정치를 통해 정책을 개선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것도 많지만 벽도 많았다. 그 얘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한다.

경사로 같은 부족한 인프라도 여전히 문제다. 하지만 규격에 대한 강박, 그게 내겐 가장 큰 벽이었다. 초고속 성장을 해서인지 한국은 기본적으로 획일화된 사회다. 유행을 좇아가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고,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일반인’이 아닌 ‘이반인’이 된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 가야 하고, 대학 졸업 후엔 취업, 그다음엔 결혼, 그다음은 또 임신출산….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인생 경로가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 안에서만 살라는 무언의 압박을 맞닥뜨릴 때마다 고민이 크다. 장애는 그 자체로 규격이 아니니 모든 일상이 난감하다.

다른 벽도 무수히 많다. 대한민국 출신 여성·청년·장애인이 겪는 벽은 각각의 다른 정체성으로도, 또 이 세 정체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더 커진다. 예컨대 여성, 특히 장애 있는 여성이라 취업 전선이 훨씬 고달프다. 그리고 여전히 너무나 많은 휠체어 접근이 안 되는 건물에선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내겐 무용지물인 그 건물 안에서 얼마나 무궁무진한 문화와 정보가 오가고 있을까. 때론 좌절스럽고 때론 그저 부럽다.

하지만 언제까지 좌절하고 부러워만 할 수는 없다. 난 보이지 않는 장벽을 부수고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니까.
그래서 몇 가지를 부탁하려 한다. 누구든 함부로 다른 이를 재단하지 말아 달라고. “너는 아직 어려서 정치하면 안 돼”라거나 "이젠 장애인 살기 꽤 좋은 시절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려면 최소한 이런 정도의 성의는 보였으면 좋겠다. 대체 몇 살부터가 정치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는지 답을 주거나(참고로 이제 만16세부터 정당가입이 된다), 혹은 휠체어 타고 딱 하루만 집 밖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보길 바란다. 집 앞 편의점에 가고 카페에서 음료 주문하려고 키오스크 누르고, 그 흔한 택배 상자 하나 옮겨보면 평소 휠체어 탄 사람들이 얼마나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장벽과 마주하는지 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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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당사자 입장에서 쓴 홍서윤 더불어민주당 청년대변인의 칼럼을 읽고, 여러 장애인 인권 관련 시위 현장에서 장애인과 마주하는 현직 경찰 '달나라금토끼(필명)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또 함께 읽어보면 좋을 서울대 졸업 연설문도 소개합니다. 졸업생 대표로 연설한 선천성 시각장애인인 강민영(27)씨는 지난해 11월 5급 행정고시 교육행정 직렬에 수석 합격했습니다. 중증 시각장애인으로는 최초입니다. 강씨가 지난달 25일 서울대 76회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한 내용 전문은 중앙일보 사이트(www.joongang.co.kr/series/11534) 홍서윤 칼럼 하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