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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 수사 한 달…'대표이사 처벌법', 근로자는 보상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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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하 중처법)이 시행(1월 27일)된 뒤 한 달 동안 42명이 산업재해로 숨졌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명 줄었다. 하지만 건설업종에서 설 연휴와 중처법 1호를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공사 중지를 하는 사례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통계상 감소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제조업에선 지난해 같은 기간 13명에서 18명으로 오히려 5명 늘었다. 중대재해가 가장 많은 업종인 건설업에선 15명이 사망해 5명 감소했다.

정부는 중대재해 사고가 발생한 회사를 상대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다. 지방에서 난 사건이라도 본사를 대상으로 예외없이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등 강제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수사 대상에 오르지 않는 사례도 있다. 때론 수사를 하다 중처법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있다. 한 달 동안의 수사 과정에서 나타난 쟁점을 파악하느라 기업들은 분주하다.

중처법에 따라 수사를 진행하다 자칫하면 근로자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우려가 있는 경우 정부는 수사에 신중을 기하는 사실도 확인됐다.

① CEO가 보고도 안 받는다…CSO가 책임?

근로자 사망과 같은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일부 기업은 "대표이사(CEO)는 안전 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항변 또는 해명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예산과 인사권을 모두 안전담당 임원 또는 대표(CSO)에게 일임하고 보고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2일 오전 근로자 사망사고가 발생한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모습. 민주노총 금속노조

2일 오전 근로자 사망사고가 발생한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모습. 민주노총 금속노조

일부 유명 법무법인(로펌)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CEO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용노동부와 경찰은 이에 대해 "대표이사 처벌을 둘러싼 기업의 공포심을 이용해 기업 고객을 유치하려는 얄팍한 '모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하고 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처법의 처벌 대상은 '사업을 총괄하는 사람'이다"라며 "중처법에선 안전부문과 같은 특정 사업부문이나 지역 등의 개별 사업장을 처벌 단위로 보지 않는다. '사업'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인력, 조직, 예산 등에 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자가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그 실질을 신중히 살펴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고용부가 진행하는 수사 방향도 이런 해석과 맞물려 있다. 본사를 대상으로 압수수색과 핸드폰 포렌식 수사를 하는 등 CEO를 지키려는 기업의 방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표이사를 정조준했다. 고용부 고위 관계자는 "일부 기업이 'CEO는 보고도 안 받는다'며 방어에 나서지만, 이는 오히려 사업을 총괄하는 대표가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 것으로 해석돼 더 무거운 책임을 질 수 있다"고 귀띔했다.

② 쪼개기 하청으로 책임 회피?

건설업의 경우 공사금액이 50억원 이상인 경우만 중처법이 적용된다. 50억원 미만은 2024년 1월로 시행이 유예된 상태다. 다만 50억원 미만이라도 하청업체 근로자가 사망한 경우는 원청이 책임을 진다. 이 때문에 일부 하청업체가 50억원 미만으로 쪼개기 계약을 하는 '우회로' 전략을 구사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8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 판교제2테크노밸리의 한 건물 신축 현장에서 추락사고가 발생해 작업자 2명이 사망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연합뉴스

지난달 8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 판교제2테크노밸리의 한 건물 신축 현장에서 추락사고가 발생해 작업자 2명이 사망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연합뉴스

지난달 8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건설 공사 현장에서 엘리베이터 시공을 하는 근로자 2명이 추락해 사망했다. 이 사고와 관련 현대엘리베이터는 중처법 상의 처벌 대상에서 제외됐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상시근로자 수는 50인 이상으로 중처법의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현대엘리베이터가 시공사(요진건설)로부터 하도급 받은 금액은 5억3900만원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시공사인 요진건설은 중처법 대상이지만 현대엘리베이터는 중처법을 피할 수 있었다. 고용부는 현대엘리베이터에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했다.

고용부는 중처법을 피할 목적으로 50억원 미만으로 계약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 중이다. 우선 쪼개기 계약과 같은 꼼수에 대처하기 위해 산업안전 근로감독 카드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지난달 28일 현대엘리베이터를 대상으로 기획감독에 전격 돌입한 것도 이런 취지다. 기획감독은 회사 전반의 산업안전 관련 조치와 대책, 정책, 예산 등을 샅샅이 훑는다. 기업에서 "먼지털기식 근로감독"이라고 하소연할 정도로, 강도 높은 수사에 준하는 행정조치다. 기획감독에서 위반 사실이 적발되면 행정제재는 물론 형사처벌까지 각오해야 한다.

③ 과로사와 자살, 중처법보다 산업안전법 적용…보상 문제가 걸려

장관이나 지방자치단체장도 중처법 상 처벌 대상이다. 예컨대 산림청이 산림조합 등에 하도급을 줘 시행하는 벌목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면 원청 격인 삼림청의 CEO(산림청장)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환경운동연합 관계자들이 지난해 4월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산림비전센터 앞에서 열린 산림청 벌목정책 규탄 기자회견에서 '산림청 2050 탄소중립 산림 부문 추진전략'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환경운동연합 관계자들이 지난해 4월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산림비전센터 앞에서 열린 산림청 벌목정책 규탄 기자회견에서 '산림청 2050 탄소중립 산림 부문 추진전략'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데 경기도 용인시에서 18일 보건담당 공무원이 과로로 쓰려져 의식불명에 빠졌다. 나흘 뒤 의식을 되찾았지만 숨지기라도 했다면 중대재해로 이어질 뻔했다. 그러나 고용부는 이 사안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업무 과중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인력 추가 투입이나 휴식 시간 부여와 같은 안전조치를 하지 않은 책임이 명확한데도 그랬다.

중처법 시행령에는 '과로사'와 같은 업무 과중에 따른 중대재해는 제외돼 있다. 과로에 따른 중대재해는 근로자 개인의 질병 이력과 같은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할 수 있어서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업무 연관성과 기저 질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중대재해 수사 대상에선 제외된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봉천터널 도로건설공사 2공구 공사현장을 방문해 공사 진행 상황과 중대재해처벌법 이행 현황 등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세훈 서울시장이 2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봉천터널 도로건설공사 2공구 공사현장을 방문해 공사 진행 상황과 중대재해처벌법 이행 현황 등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고 수사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고소·고발이 있으면 수사할 수 있다. 다만 중대재해 수사심의위원회에서 수사대상으로 분류할 경우 진행된다.

정부가 이런 방침을 정한 것은 근로자의 보상 문제를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처법을 적용해 수사한 결과 처벌 대상인 사업주에게 귀책사유가 없다고 판정 나면 근로자가 산업재해에 따른 보상을 못 받을 수 있다. 과로에 따른 중대재해나 자살의 경우 중처법 대신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처리하면 산업재해로 거의 보상이 된다. 그러나 중처법을 적용하는 순간 CEO에게 잘못이 있다는 결론이 나와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자칫하면 근로자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고용부 고위 관계자는 "산업안전에 대한 기업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로자의 입장에서 유리한 쪽을 배려하는 것도 행정·수사 기관이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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