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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박원순 독선인가 유산인가…잠실5단지 '1동 남기기' 철회

중앙일보

입력

내년 2월 완공을 목표로 재건축 중인 서울 강남구 개포4단지(개포프레지던스자이). 난방용 연탄 아궁이를 쓴 아파트라는 기억을 남기고자 옛날 아파트 두 동을 그대로 남겼다. 한은화 기자

내년 2월 완공을 목표로 재건축 중인 서울 강남구 개포4단지(개포프레지던스자이). 난방용 연탄 아궁이를 쓴 아파트라는 기억을 남기고자 옛날 아파트 두 동을 그대로 남겼다. 한은화 기자

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주공5단지에서 추진되던 서울시의 ‘한 동 남기기’ 정책이 철회됐다. 지난달 16일 서울시에서 통과된 정비계획변경안에서 관련 내용이 빠진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한 동을 기부채납(공공기여) 받아 문화시설로 바꾸는데 드는 돈으로 임대주택 37가구를 더 짓기로 계획을 바꿨다.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10년 추진한 '한 동 남기기' #결국 원형보존 없던 일로 #미래유산VS흉물 사이에서 #남기기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당초 서울시의 미래유산 보존 방침에 따라 잠실주공5단지의 30개 동 중 1개 동을 남기는 방안이 추진됐다. 기부채납 후보로 거론됐던 동은 한강 변에 위치한 523동이다. 서울시는 재건축할 때 523동을 문화시설로 단장하고 이 동을 포함한 주변을 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도시공원법상 공원 내 건물이 4층 높이를 초과할 수 없어 15층짜리 아파트를 잘라 4층까지만 남기려고 했다. 아파트 11개 층을 자르면서까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기려고 했던 이유는 “중앙난방 시스템을 도입한 최초의 아파트”라는 의미 때문이다.

서울시의 방침을 토대로 잠실주공5단지는 2017년 재건축 아파트 최초로 국제설계공모전까지 열었지만, 당선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로 사업이 멈췄다. 4년여가 흐른 뒤에서야 정비계획변경안이 서울시에서 통과됐고, 사업이 재개됐다. 서울시가 ‘한 동 남기기’를 추진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523동 역시 철거된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남긴 한 동을 문화시설로 쓰려면 운영 및 계획을 맡을 부서가 있어야 하는데 내부적으로 나서는 곳이 없었다”며 “잠실 일대를 ‘마이스(MICE)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추가적인 문화시설은 필요 없다는 의견이 나와 공공임대주택으로 대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523동의 모습. '한 동 남기기'로 했다가 철회됐다. 한은화 기자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523동의 모습. '한 동 남기기'로 했다가 철회됐다. 한은화 기자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재임 시절 강력히 추진했던 ‘한 동 남기기’ 정책이 오세훈 시장 들어 정리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이 정책이 가장 먼저 추진됐던 강남구 개포동 개포주공 1ㆍ4단지의 경우 재건축 공사가 한창이지만 정비계획 변경을 할 예정이다. 서울시 측은 “기존 계획대로 아파트 한 동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보다 상당수 철거하고 야외 휴식공간으로 조성하면서 기존의 건축물 흔적을 남긴다거나, 새로 지어지는 공공청사 내에 기존 아파트 일부를 남기는 식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서울 재건축 단지 중 유일하게 한 동이 그대로 남는 단지는 반포주공1단지다. 108동 한 동을 남겨 주거역사박물관으로 만든다. 현재 서울시는 박물관 운영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10년에 걸쳐 추진된 ‘한 동 남기기’ 사업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근·현대 역사와 미래 유산을 보존ㆍ관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됐지만, 재건축 사업의 인허가권을 쥔 공공의 횡포이자 사유재산 침해라는 반발도 컸다. ‘미래유산’ 또는 ‘흉물’이라는 극과 극의 주장 사이에서 ‘한 동 남기기’ 정책은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와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와 함께 짚어봤다.

한 동 남기기는 공정하지 못했다

이창무 교수는 ‘한 동 남기기’를 추진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절차적인 문제점부터 지적했다. 이 교수는 “연탄 아파트 보존 결정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거치지 못한 독선적인 선택이었다”고 진단한다.

왜 독선적이라고 보나.  
“‘한 동 남기기’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본위원회도 아닌 소위원회에서 갑자기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도 다른 안건으로 열린 자리였다. 개포주공1단지의 경우 2012년 8월 소형 아파트 공급비율을 논의하자며 소위원회를 열었는데 갑자기 한 동 남기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두 달 뒤인 10월에 다시 열린 소위원회에서 1개 동을 원형대로 보존한다는 결론을 냈다. 당시 박원순 시장이 원하고 시장과 더불어 서울시를 점령한 권력들이 요구하니까 서울시에서 안건을 끼워 넣은 것이다.”

서울 재건축 사업지에서 ‘한 동 남기기’가 가장 먼저 거론된 것은 개포주공4단지다. 2011년 박원순 전 시장이 당선된 직후 열린 소위원회에서 이런 의견이 나왔다. 이듬해 4월 박 전 시장이 개포지구를 방문해 한국 최초 연탄보일러 아파트인 개포주공의 한 동을 미래유산으로 남기자고 제안했고, 두 달 뒤 서울시는 ‘근현대 유산의 미래 유산화 기본구상’을 발표했다. 20세기 근현대 유산을 미래세대를 위해 남기자는 구상이었다. 관 주도의 규제방식을 탈피해 시민의 자발적 보존 의지를 토대로 추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하여 정비사업장마다 서울시가 권고하고 주민이 직접 제안하는 형태로 ‘한동 남기기’가 정책화됐다.

한창 공사 중인 개포주공4단지. 한은화 기자

한창 공사 중인 개포주공4단지. 한은화 기자

개포주공4단지에 남겨진 두 동의 모습. 서울시는 최근 원형 보존 방침을 철회했다. 한은화 기자

개포주공4단지에 남겨진 두 동의 모습. 서울시는 최근 원형 보존 방침을 철회했다. 한은화 기자

어떤 절차를 거쳤어야 했나.
“공공성에 대한 논란이 큰 이슈인 만큼 절차적인 과정을 지키고 충분히 공론화됐어야 했다. 남겨야 할 아파트 한 동의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논의조차 못 했다. 현재는 남아 있지도 않은, 연탄아궁이를 썼던 아파트라는 이유로 보존해야 하는 걸까. 2018년 서울 연구원에서 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뒤늦게 하니 시민의 80%가 ‘한 동 남기기’가 필요 없다고 답했다.”
자발적 사업임을 강조했지만, 재산권 침해 논란이 컸다
“남겨진 동이 흉물이 되어 주거환경의 질을 낮춘다는 반발이 컸다. 이런 재산권 침해 논란을 넘어설 만큼 한 동 남기기를 통해 실현할 수 있는 공공성이 큰가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인허가권을 쥔 공공의 횡포였다.”  
과거 유산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유산을 남기자고 말하면 대다수가 동의한다. 하지만 어떤 유산을 남길지는 치열하게 논의해야 한다. 미래만 바라보며 과거를 부숴서는 안 된다고 뭉뚱그려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따져야 한다. 도시계획 정책을 추진할 때는 여러 주관적인 갈등이 폭발한다. 그래서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선택하고 결정하는 절차가 정말 중요하다. 아파트 한 동 남기기는 그러지 못했다. 편향된 이념의 사람들이 독선으로 요구한 결과였다. 공정한 절차를 거치지 못할 만큼 강한 독선이었다.”

시행착오가 있다고 중단해선 안 된다 

안창모 교수는 ‘한 동 남기기’ 정책을 지지한다. 안 교수는 “심사숙고해서 결정된 안들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보존 결정을 내린 아파트의 주거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의견이었다.

왜 남겨야 하는가
“잠실·반포 등은 강남개발 역사의 시작점이었다. 잠실5단지의 경우 중산층을 위한 첫 고층아파트였다. 유산이라고 하면 찬란하고 아름다운 문화유산만 떠올린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오늘날 한국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 아파트다. 한국사회의 핵심적인 장소이자 건물이며 우리의 유산이다.”
잠실주공5단지 내에 있는 굴뚝. 최초의 중앙난방 아파트다.    한은화 기자

잠실주공5단지 내에 있는 굴뚝. 최초의 중앙난방 아파트다. 한은화 기자

꼭 그 자리에 남겨야 하나  
“현장성은 중요하다. 반포주공1단지의 경우 남겨진 건물을 보면서 ‘한강 땅을 매립해 아파트를 지었지’ 라며 강남 개발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고, 후세대에 알릴 수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가면 20세기 초에 지어진 노동자 주택이 있다. 반포 아파트와 비슷한 판상형 아파트 단지인데, 현재도 집 하나를 비워서 모델하우스처럼 구경하게 해놨다. 부엌가구가 유명한데 금호미술관이 콜렉션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이 단지는 당시 삶의 현장을 현장에서 보여준다. 20세기의 삶을 개선하려 했던 공공의 노력과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다.”
사유재산 침해 논란도 있는데
“조합원은 용적률 상향으로 인한 엄청난 재산상의 이익을 가져간다. 늘어난 용적률만큼 공공에서는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기부채납을 받는데 한 동 남기기도 그중 하나고, 역사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사유재산 침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충분한 논의를 거쳤다면 어땠을까
“맞는 이야기지만, 모든 역사는 누군가가 결심했을 때부터 일어난다. 그래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오늘날 ‘바우하우스’가 중요하게 거론되지만, 처음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남겨놨는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곳도 많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처음부터 잘할 수 있을까. 보존 정책을 처음 추진하는데 완벽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럽의 도시는 수백 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좋은 것만 남은 상태다.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시행착오가 있다면 다음에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고 나은 결과를 만들면 된다. 옳은 방향이라면 고쳐가야 할 것이지 없애서는 안 된다. 시행착오를 통해 교훈을 얻고 이어가야 한다.”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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