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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왜 몸이고 포도주는 피인가…동전 양면같은 예수의 정체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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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가복음 14장 18절)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며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자, 다들 자신을 아니라며 부인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며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자, 다들 자신을 아니라며 부인했다.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다시 들여다본다. 예수와 12사도. 그림 속에는 정말 13명의 인물만 있을까. 안드레와 베드로의 사이에, 사도 요한과 예수 사이에, 빌립과 마태의 사이에 우리도 앉아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예수에게 묻고 있지 않을까.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이다.

(40)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 걸까

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그 인물이 나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스스로 알기에 더 크게 묻는다. 예수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가룟 유다 뿐만이 아니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체포됐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끌려가는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만이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랬던 베드로도 결국 부인했다. “당신도 한패가 아니오?”라는 말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며 세 차례나 부인했다. 닭이 울기도 전에 말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구 시가자 광경이다. [중앙포토]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구 시가자 광경이다. [중앙포토]

그러니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예수의 한마디는 누구의 가슴을 찔렀을까. 12사도 모두의 가슴을 찌르지 않았을까.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말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듯이 말이다.

제자들은 음식을 먹었다. 예수는 빵을 들고 축복했다. 그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며 예수는 말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복음 26장 26절)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누가복음 22장 19절)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린 뒤 제자들에게 주며 말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복음 26장 27~28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누가복음 22장 20절)

예수는 말했다. “내가 떼어서 주는 이 빵이 나의 몸이요, 내가 주는 이 잔의 포도주가 나의 피다.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이 너와 내가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무슨 뜻일까. 누룩을 넣지 않은 소박한 무교절 빵을 왜 예수는 ‘나의 몸’이라고 했을까. 또 잔에 담겨 있던 붉은 포도주를 왜 ‘나의 피’라고 했을까. 그걸 왜 받아 마시라고 했을까.

예수와 제자들은 무교절 음식을 함께 나누며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다.

예수와 제자들은 무교절 음식을 함께 나누며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정체를 착각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게 예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존적 예수’, ‘역사적 예수’에만 방점을 찍기도 한다. 동전의 한쪽 면만 보는 셈이다. 눈에 보이는 바깥 풍경만 보는 셈이다.

동전에는 양쪽 면이 있다. 둘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동전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역사적 예수’, ‘실존적 예수’는 동전의 앞면이다. 땅 위에 올라와 있는 나무의 밑동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동전의 뒷면이 있다. 나무로 치면 땅속에서 나무를 받치고 있는 뿌리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서 있을 수 없다. 뿌리로 인해 몸통과 가지와 잎도 서 있다. 예수에게도 뿌리가 있다. 그 뿌리까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내면에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을 파보면 ‘신의 속성’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와 ‘복음적 예수’는 둘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동전의 뒷면에 ‘복음적 예수’가 있다. 또 ‘복음적 예수’라는 동전의 앞면에 ‘역사적 예수’가 있다. 예수는 동전 자체다.

나사렛의 수태고지 교회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이다. 빛과 어둠의 대비가 아름답다. [중앙포토]

나사렛의 수태고지 교회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이다. 빛과 어둠의 대비가 아름답다. [중앙포토]

2000년 전에는 처형장과 묘지가 있던 골고다 언덕에 지금은 성묘 교회가 서 있다. [중앙포토]

2000년 전에는 처형장과 묘지가 있던 골고다 언덕에 지금은 성묘 교회가 서 있다. [중앙포토]

하나의 예수를 둘로 쪼개는 건 사람들이 ‘땅 밑의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 위에 솟아 있는 부분, 즉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나무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가 말한 ‘나의 몸’은 과연 뭘까. 예수가 설한 ‘나의 피’는 대체 뭘까. 그게 정말 예수가 손으로 집어서 떼어준 한 조각의 빵일까. 아니면 잔에 담겨 있던 한 모금의 포도주일까. 나는 ‘최후의 만찬’을 열었던 방을 거닐었다. 예수가 던진 말씀의 첫 단추를 묵상했다. 예수는 왜 나의 몸, 나의 피를 받아먹으라고 했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몸, 우리의 피’를 바꾸기 위함이다. 예수의 몸이 나의 몸이 되고, 예수의 피가 나의 피가 되라고 말이다. 그렇게 바뀜의 순간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러니 예수의 몸과 예수의 피는 예수의 정체성이다. 그것이 바로 ‘신의 속성’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 피로 맺은 새 계약”이라고 말했다. 율법으로 맺은 형식적인 계약이 아니라 속성으로 맺은 본질적인 계약이기 때문이다.

“나의 몸을 먹고, 나의 피를 마셔라.”

성묘 교회 안에 있는 십자가 예수 상. 이곳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온다. [중앙포토]

성묘 교회 안에 있는 십자가 예수 상. 이곳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온다. [중앙포토]

예수의 이 말은 물음이다. 1000년 아니 2000년이 흘러서도 녹슬지 않고 날아와 꽂히는 화살 같은 물음이다. 그 화살은 지금도 우리를 쏘아본다.

“너는 예수의 몸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셨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인가. 너의 주인공은 무엇인가.”

예수는 그렇게 묻는다.

“나의 몸이 너의 몸이 되고, 나의 피가 너의 피가 되었다. 그럼 너는 누구인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사는 것인가, 아니면 네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인가.”

〈41회에서 계속됩니다. 토요일 연재. 다음 주는 쉽니다〉

짧은 생각

일간지 종교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많은 수도자를 만났습니다.

개신교의 영성가도 있었고,
가톨릭의 수도원에서 예수를 찾아가는 수사도 있었고,
전문 성직자는 아니지만 아주 깊은 눈을 가진
재야의 고수도 여럿 만났습니다.

저는 그들과의 인터뷰 말미에
종종 이런 물음을 던졌습니다.

  “성경에서 가슴에 꽂고 사는
   딱 한 구절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합하면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구절을 꼽으면
각자 다른 대목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적지 않은 사람이
하나의 구절을 꼽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통 분모’였습니다.

그 구절이 뭐냐고요?
다름 아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저는 이 구절을 안고서 묵상에 잠겼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는 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 문의 문고리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대속(代贖)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로 인해 예수 믿는 이들의 죄도 함께 사해졌다.
   예수께서 그 죄를 대신 갚았기 때문이다.”

그걸로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의 십자가’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만 있고 ‘우리의 십자가’는
보이질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만 볼 따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야말로
그리스도의 영성,
그 심장을 여는 문고리가 아닐까요.
그 문을 열려면
일단 문고리부터 잡아야하지 않을까요.

다들 하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열망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서술돼 있습니다.

그 첫 구절이,
그 첫걸음이 이렇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수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못 박히는 일입니다.
예수만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도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만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도 역시 ‘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성,
그 심장을 여는 문고리가 아닐까요.

일단 그 문고리를 잡고,
그 문을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겠지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그러니 예수님만 문고리를 잡아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
저마다의 문고리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에 문이 있고,
거기에 길이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길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나를 따라오라.
   그러지 않는 사람은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문고리도 잡을 수 없고,
그 문을 열 수도 없게 됩니다.
그 문을 열지 못하면
그 길을 걸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다시 한 번 묵상해보면 어떨까요.

그 속에 담겨 있는
문고리와 문,
그 문을 열고난 뒤에 나타나는 길.

그 속으로 발을 떼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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