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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전 독·소 400만명 싸운 우크라이나…전쟁 우습게 안 푸틴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입력

수백만이 엉켜서 싸웠던 현장

1939년 독일과 소련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반분했다. 하지만 이런 오월동주(吳越同舟) 같은 동맹이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과 한창 싸우는 중에도 침공 준비 명령을 내렸을 만큼 소련 정복에 대한 의지가 컸다.

이에 따라 독일 군부는 계획을 짜느라 동분서주했는데, 핵심은 어디로 어떻게 공격하는가였다. 30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할 예정이어도 소련이 워낙 거대해서 빗자루 쓸 듯이 점령하기는 애초 불가능했다.

1920년대 소련의 체제 선전 포스터. 돈바스가 소련의 심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로 한 이상 우크라이나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결국 최대 400만이 몰려서 격전을 벌인 지옥이 되었다. 위키미디어

1920년대 소련의 체제 선전 포스터. 돈바스가 소련의 심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로 한 이상 우크라이나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결국 최대 400만이 몰려서 격전을 벌인 지옥이 되었다. 위키미디어

이 때문에 점령 효과가 큰 목표를 선정하고 이에 맞춰 전력을 나눠 공세를 펼쳐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군부와 히틀러의 생각이 갈렸다. 1940년 8월 군부가 보고한 침공 계획 초안에는 모스크바와 키이브(키예프)가 목표였다.

하지만 12월, 히틀러는 총통 명령 21호에서 레닌그라드와 키이브를 목표로 선정했다. 군부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모스크바를 중시했지만, 히틀러는 소련의 관문인 레닌그라드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브 점령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키이브를 거론하였을 만큼 우크라이나는 상당히 중요한 곳이다.

흑토로 뒤덮인 끝이 보이지 않는 곡창지대는 소련이 소비하는 곡물의 35%를 생산하고 도네츠강 일대의 돈바스는 무궁무진한 석탄과 철광이 매장되어 있다. 한마디로 소련의 보물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우크라이나가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영토가 크다는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필연적으로 전장이 클 수밖에 없고 당연히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독소전쟁 개전 당시에 우크라이나를 공략할 독일 남부집단군은 약 100만에 이르렀다.

소련에게도 당연히 중요한 곳이었기에 약 150만의 병력으로 구성된 키이브 특별군관구가 해당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1941년 키이브 전투 당시에 불타는 도심을 바라보는 독일군. 경기도만한 지역에서 양측 합쳐 120만이 격돌한 한 달간의 전투에서 독일군은 무려 70만의 소련군을 제거하는 단일 전투 역사상 최대의 대승을 거두었다.

1941년 키이브 전투 당시에 불타는 도심을 바라보는 독일군. 경기도만한 지역에서 양측 합쳐 120만이 격돌한 한 달간의 전투에서 독일군은 무려 70만의 소련군을 제거하는 단일 전투 역사상 최대의 대승을 거두었다.

전쟁 초기인 1941년 8월에 벌어진 키이브 전투에서 경기도 정도의 공간을 놓고 양측 합쳐 무려 120만이 격돌했다.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더욱 많은 병력이 우크라이나에 집결해서 싸웠는데 1943년 중에는 양측 합쳐 400만 가까이 되기도 했다. 20세기 이후의 전쟁은 화력이 판세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됐지만, 전쟁 공간이 크면 어쩔 수 없이 많은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지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난 2022년 2월 24일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약 20만 정도를 동원해 침략에 나섰다. 이에 맞선 우크라이나군도 총동원령을 내리기 전에 약 20만 정도였다.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1개 사단이 담당하는 작전영역은 20세기 초와 비교하면 대략 10배 정도 늘어났다.

그렇다면 양측 합쳐 40만은 독소전쟁 당시에 같은 곳에서 싸운 400만과 같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약 20만을 투입했다. 아무리 기계화부대를 전면에 내세웠어도 우크라이나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작전을 펼치기에는 투입된 병력이 너무 적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informnapalm.org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약 20만을 투입했다. 아무리 기계화부대를 전면에 내세웠어도 우크라이나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작전을 펼치기에는 투입된 병력이 너무 적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informnapalm.org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이는 너무 편의적인 추산이다. 무기, 통신, 이동 수단의 발달로 군의 작전영역이 대폭 확대된 것은 맞지만, 무기와 달리 병사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10배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라는 공간을 생각한다면 이번 전쟁에 러시아가 투입한 병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다. 그런 예측대로 예상치 못한 고전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러시아군이 선봉에 내세운 대대전술단(BTG·Battalion Tactical Group)은 2014년 크림반도 점령 당시에 위력을 발휘했지만, 이번에는 망신이었다. 저강도 분쟁 진압용으로 육성해 온 대대전술단을 전면전, 그것도 종심이 깊은 우크라이나 같은 곳에 투입했다는 자체가 오판이었던 것이다.

특히 보급 측면에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노출했다. 제병협동제대를 너무 잘게 쪼개면서 지원해야 할 곳이 많아지다 보니 후속 보급 체계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었다.

핵심 목표만 골라 어느 한 방향으로 돌파구를 내고 전력을 집중투사해도 점령할 수 있을지 모르는 판인데, 겨우 20만을 동원하고 그것도 무려 60여 개의 BTG로 나누어 거대한 국경 전체에서 침공을 감행했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이 출몰한 모든 곳에서 일일이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만 골라 총력 방어전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마디로 러시아의 만용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우크라이나의 선전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직접 참전한 것은 아니나 세계가 한목소리로 러시아를 성토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에 적극적인 현상은 유례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 또한 조국을 수호하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놀라운 항전 의지가 없었다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분오열되어 대립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이 위기가 닥치자 경이로울 정도로 단결하는 모습을 푸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격파당해 불타는 러시아군 전차.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는 세계인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설령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해도 지배는 어려울 것이다. 트위터 IAPonomarenko 계정

격파당해 불타는 러시아군 전차.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는 세계인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설령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해도 지배는 어려울 것이다. 트위터 IAPonomarenko 계정

이런 상황이라면 설령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배는 실패할 것이 자명하다. 지금도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데 점령지를 관리하려면 추가 투입이 필요하고 거기에다 저항이 지속적이고 극렬하다면 러시아 체제까지 위협할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벌어진 많은 전쟁이 그랬다. 하다못해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혹독한 경험을 했다. 너무 안이하게 시작한 전쟁의 결과가 결코 좋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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