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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1번지 제주…그곳서 얻은 자식 이름엔 공통점이 있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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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8호 24면

[휴가지가 된 유배지] 제주도

그 섬에 성이 있다. 추려보면 제주에 성은 더 있지만, 제주읍성·대정읍성·정의읍성 ‘삼성(三城)’은 삼각형으로 섬을 지켰다. 한라산(1950m)이 가운데에 버티고 있다. 왜구를 막고자 한 삼성은 동시에 유배 온 이들의 거점이 됐다.

제주를 감쌌던 제주읍성은 둘레 2280m 중 대부분을 1920년대 제주항 건설에 필요한 바다 매립에 내줬다. 지금은 170m만 남아있어 '제주성지(城址)'로 부르고 있다. 제주읍성 위로 보이는 제이각(制夷閣)은 성벽으로 오랑캐(왜구)를 물리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를 감쌌던 제주읍성은 둘레 2280m 중 대부분을 1920년대 제주항 건설에 필요한 바다 매립에 내줬다. 지금은 170m만 남아있어 '제주성지(城址)'로 부르고 있다. 제주읍성 위로 보이는 제이각(制夷閣)은 성벽으로 오랑캐(왜구)를 물리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는 유배 1번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유배지는 245곳이고 유배인은 700여 명에 이른다. 조선 시대에 260여 명이 제주에서 귀양살이했으니, 전체 유배인 수 3분의 1을 넘는다. 제주는 한양에서 직선거리로만 1158리(455㎞)로 아득하리만치 멀고, 바다가 가시 돋은 탱자나무처럼 둘러치고 있으며, 게다가 관리에 의한 통제가 수월했다.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은 독립운동가 이승훈(1864~1930). 일제가 보냈다. 1911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제주는 휴가지를 놓고 강원과 1순위를 다투고 있다. 유배 1번지에서 휴가 1번지가 된 제주의 ‘삼성’에 다녀왔다.

#『제주풍토기』엔 해녀 관련 최초 기록
인천~제주 뱃길은 세월호 침몰 후 7년 8개월 만인 지난해 12월에 다시 열렸다. 지난 1월 3일 제주에 가는 여객선 중 최대(배수량 2만7000t)인 ‘비욘드트러스트’에는 승객 200여 명이 밤바다의 부드러운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안톤 반 주트펀(70)은 "2층 침대에서 곤하게 잤을 정도로 흔들림을 못 느꼈다"며 "사실, 매점에서 파는 맥주를 한 캔 들이켠 게 숙면에 도움이 되지 않았겠나"라며 웃었다.

지난 1월 6일 오전 제주시 건입동에 위치한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 제 6부두로 비욘드트러스트가 입항하고 있다. 비욘드트러스트는 지난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이후 7년 8개월 만인 2021년 12월 인천~제주 뱃길을 다시 연 2만7000t 여객선이다. 정준희 기자

지난 1월 6일 오전 제주시 건입동에 위치한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 제 6부두로 비욘드트러스트가 입항하고 있다. 비욘드트러스트는 지난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이후 7년 8개월 만인 2021년 12월 인천~제주 뱃길을 다시 연 2만7000t 여객선이다. 정준희 기자

124년 전 1월, 구한말의 거물 정치인 김윤식(1835~1922)도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는 증기선 2층 침대에 올랐다. 그는 을미사변(1895년) 직후 명성황후를 폐위한다는 조칙을 각국 공사관에 통보했다는 이유로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김윤식은 일기 형식으로 제주에서 보낸 3년 6개월을 『속음청사』에 썼다. ‘광무 2년(1898년) 1월 7일 출항. 배가 바람에 몹시 흔들려 구토하며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오직 나만 다행히 면했다….’ 김윤식이 탄 배는 군산과 목포를 거쳐 제주 산지포에 도착했다. 4박 5일의 고단한 뱃길이었다. 비욘드트러스트는 14시간30분 만에 인천~제주 뱃길을 끊었다.

김윤식은 현재의 제주시 일도1동을 적거지(謫居地, 귀양살이하는 곳)로 삼았다. 제주읍성 안이었다. 기생과 놀고, 현지에서 소실로 맞이한 ‘의주녀’와 사이에서 아들 영구(瀛駒)도 얻었다. 유배인이 제주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이름에 제주를 뜻하는 ‘제(濟)’, ‘영(瀛)’, ‘탐(耽)’자를 넣고는 했다. 제주에 유배된 이익(1579~1624)도 현지에서 얻은 아들 이름을 인제(仁濟)라고 지었다.

제주읍성 동문 근처에 생긴 동문시장은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운양 김윤식과 충암 김정은 현재의 동문시장 근처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김홍준 기자

제주읍성 동문 근처에 생긴 동문시장은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운양 김윤식과 충암 김정은 현재의 동문시장 근처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김홍준 기자

제주시 일도2동 동문시장 근처의 남수각하늘길 벽화거리. 총 220m에 이른다. 남수각은 동문시장을 관통하는 산지천 위에 만든 다리다. 1599년(선조 32) 목사 성윤문이 북수구와 함께 이곳에 남수구를 만들고 밑에는 홍예다리를 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웠다. 홍수로 인한 유실과 재건이 반복돼다 어느새 사라졌다. 근처에 유배 온 김정의 적거지 추정 가옥이 있다. 지난 1월 5일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서모(57)씨가 친구인 김모(58·경기도 의정부시)씨와 함께 43년 만에 고향을 찾아 벽화거리를 거닐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시 일도2동 동문시장 근처의 남수각하늘길 벽화거리. 총 220m에 이른다. 남수각은 동문시장을 관통하는 산지천 위에 만든 다리다. 1599년(선조 32) 목사 성윤문이 북수구와 함께 이곳에 남수구를 만들고 밑에는 홍예다리를 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웠다. 홍수로 인한 유실과 재건이 반복돼다 어느새 사라졌다. 근처에 유배 온 김정의 적거지 추정 가옥이 있다. 지난 1월 5일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서모(57)씨가 친구인 김모(58·경기도 의정부시)씨와 함께 43년 만에 고향을 찾아 벽화거리를 거닐고 있다. 김홍준 기자

김윤식은 『속음청사』에 제주 관리들의 학정에 대항한 방성칠의 난(1898년), 이재수의 난(1901년)까지 자세히 묘사했다.

‘1898년 2월 28일. 들으니 민(民)의 장두 방성칠이 (제주) 목사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 성 밖에 모여서 다만 물어볼 죄인이 있으니 호출하는 대로 내보내 주기만 하면 된다, 내일은 모두 성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3월 15일. 병사들이 집을 둘러싸고 불을 지르자 방역(방성칠)은 나오며 피하려다가 …두 일곱 군데 창을 맞고 쓰러졌다고 한다.’ ‘1901년 5월 29일. 여러 민중이 제수(이재수)를 꾀어 장두로 추천하였다. 나이는 21세인데 어리석고 우둔하여 지각이 없고….’

김윤식에 대한 정치 행보 평가가 어떻든 간에, 『속음청사』가 제주 근대사를 보여주는 문헌이라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이 민란들은 제주읍성을 무대로 일어났다.

제주시 제주성지 안에 있는 오현단에는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五賢)을 기리는 탑이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시 제주성지 안에 있는 오현단에는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五賢)을 기리는 탑이 있다. 김홍준 기자

이미 김윤식 이전에 제주 유배기록을 남긴 이가 김정(1486~1521)이다. 김정은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돼 제주로 유배됐다. 김정은 제주읍성 동문 근처 언덕에서 유배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때 쓴 『제주풍토록』은 제주의 풍경에 대해 사뭇 냉소적이다. ‘볼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기후만 해도 그렇다. 겨울에는 혹 따뜻하기도 하고, 여름에는 혹 서늘하기도 하다.’ 주로 뱀을 모시는 300여 개의 ‘요사스러운’ 사당이 있고, 한라산 백록담의 움푹한 분화구를 ‘괴이하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이 색다른 곳을 밟아보기도 하고, 이 유별난 풍속을 보게 됨은 세상의 기이하고 장쾌한 일 아니던가.’ 그가 제주에서 가장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것으로 꼽은 건 청귤(靑橘)이다.

제주에서 귤 농사를 짓는 강은형(51)씨는 "청귤은 제주 재래종인데 이맘때인 3~4월에 속이 익는다"며 "현재 시중에서 유통되는 일명 '풋귤'로 부르는 청귤과는 다르다"고 밝혔다.

제주시 제주성지 안에 있는 오현단((五賢壇)은 1520년(중종 15년)에 유배된 충암 김정, 1534년(중종 29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년)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년)에 유배된 동계 정온, 1689년(숙종 15년)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 유배인이나 부임 관리 신분으로 제주 교학 발전에 기여한 다섯 명을 기린다. 귤림서원(橘林書院)이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지자, 고종 29년 (1892년)에 서원에서 모시던 오현의 위패를 대신해 이 조두석을 세웠다. 돌에 새긴 각자(刻字) 없이 33~35㎝ 간격으로 배열돼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시 제주성지 안에 있는 오현단((五賢壇)은 1520년(중종 15년)에 유배된 충암 김정, 1534년(중종 29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년)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년)에 유배된 동계 정온, 1689년(숙종 15년)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 유배인이나 부임 관리 신분으로 제주 교학 발전에 기여한 다섯 명을 기린다. 귤림서원(橘林書院)이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지자, 고종 29년 (1892년)에 서원에서 모시던 오현의 위패를 대신해 이 조두석을 세웠다. 돌에 새긴 각자(刻字) 없이 33~35㎝ 간격으로 배열돼 있다. 김홍준 기자

김정은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제주로 오기 전, 충남 금산에서 유배 중 ‘무단이탈’ 해 병중의 어머니를 뵀다는 게 빌미가 됐다.

김정은 송인수(1499~1547)·김상헌(1570~1652)·정온(1569~1641)·송시열(1607~1689)과 함께 유배인이나 부임 관리로 제주 교학 발전에 기여한 오현(五賢)으로 꼽힌다. 이들을 기리는 오현단이 제주읍성을 끼고 있다. 그 너머, 가을이면 귤나무 숲이 장관을 이뤘다는 귤림추색(橘林秋色) 터가 있다.

제주를 감쌌던 제주읍성은 둘레 2280m 중 대부분을 1920년대 제주항 건설에 필요한 바다 매립에 내줬다. 지금은 170m만 남아있어 '제주성지(城址)'로 부르고 있다. 지난 1월 5일 새벽 제주읍성 동쪽 제이각(制夷閣)에서 바라본 제주읍성. 김홍준 기자

제주를 감쌌던 제주읍성은 둘레 2280m 중 대부분을 1920년대 제주항 건설에 필요한 바다 매립에 내줬다. 지금은 170m만 남아있어 '제주성지(城址)'로 부르고 있다. 지난 1월 5일 새벽 제주읍성 동쪽 제이각(制夷閣)에서 바라본 제주읍성. 김홍준 기자

1월의 이른 아침. 제주읍성을 뚫고 난 길에서 자동차는 조심스레 오갔고, 사람들은 총총걸음으로 일터로 향하고 있었다. 오현을 모신 귤림서원이 새벽의 푸르름을 벗고 귤처럼 노란 해를 맞이했다.

1920년대 제주항을 만들면서 바다를 메우는 데 제 몸 2280m 중 대부분을 내주고 꼬리처럼 170m만 남은 제주읍성. 그 한 귀퉁이에서 본 풍경이었다.

제주시 제주성지 안의 귤림서원(橘林書院). 선조 11년(1578년 ) 제주목의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을 기려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충암묘(冲菴廟)가 숙종 8년(1682년)에 귤림서원이라는 액호를 사액 받게 됐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2004년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됐다.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五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시 제주성지 안의 귤림서원(橘林書院). 선조 11년(1578년 ) 제주목의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을 기려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충암묘(冲菴廟)가 숙종 8년(1682년)에 귤림서원이라는 액호를 사액 받게 됐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2004년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됐다.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五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김홍준 기자

# 원나라 왕족·신하 170명이 초기 유배인

김정희(1786~1856)는 한양에서 호남대로를 따라 해남까지 내려갔다. 여기까지는 ‘해남로’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제주로 건너가면 이름이 바뀐다. ‘제주로’가 된다. 김정희가 귀양살이한 곳은 대정읍성 안이었다. 제주추사관은 김정희가 이곳에서 그린 세한도(歲寒圖) 속 조촐한 집 한 채를 쏙 빼내어 현대적으로 재현한 건물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의 제주추사관은 건축가 승효상이 김정희가 제주 유배 중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김홍준 기자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의 제주추사관은 건축가 승효상이 김정희가 제주 유배 중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김홍준 기자

김정희가 제주 유배 중 그림 세한도(歲寒圖). [중앙포토]

김정희가 제주 유배 중 그림 세한도(歲寒圖). [중앙포토]

화가 임옥상이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제주추사관 안에 만든 '추사 영실'에는 추사 김정희의 흉상이 설치돼 있다. 김홍준 기자

화가 임옥상이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제주추사관 안에 만든 '추사 영실'에는 추사 김정희의 흉상이 설치돼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1월 5일 충북 제천에서 온 엄병도(76)·김문자(73)씨 부부가 한가한 걸음으로 추사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엄씨는 “어제는 저기, 한라산에 다녀왔는데 무릎이 좀 안 좋은 아내는 못 가서 좀 미안하더라”며 웃었다. 엄씨가 말한 ‘저기’ 한라산은 하얀 눈의 감투를 쓰고 있었다.

대정읍성은 독특하다. 논밭과 가옥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곳 주민에게 물어봤다. “성곽에 올라갈 수 있나요?” “저기, 잔디밭 있는 집으로 들어가. 그러면 계단이 있어. 올라가면 돼.” 결국 올라가지는 못했다.

서귀포시 대정읍의 제주추사관 뒤에서 바라본 대정읍성. 그 너머로 눈 쌓인 한라산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서귀포시 대정읍의 제주추사관 뒤에서 바라본 대정읍성. 그 너머로 눈 쌓인 한라산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섬의 동쪽으로 달려 정의읍성에 올랐다. 성읍민속마을을 품고 있는 정의읍성 성곽 일부 구간은 탐방객들이 올라갈 수 있다. 조선 왕족이 이곳에 유배됐다.

선조의 7남 인성군(이공, 1588~1628)은 역모에 두 번이나 휩쓸렸다. 제주 정의현에 유배 가기로 했지만, 전남 지도로 바뀌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대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모반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신하들의 탄핵에 인조는 그에게 자진하라고 명했다.

인성군이 죽자 그 가족은 제주 정의현에 유배됐다. 인성군의 아들 이건(1614~1662)이 이때 『제주풍토기』를 남겼다. 잠녀(해녀)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2월 이후부터 5월 이전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채취한다. 잠녀가 알몸으로 낫을 갖고 미역을 캐어 올리는 데 남녀가 서로 섞여 있으나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의읍성이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는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한천,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가족 등이 유배 갔다. 사진은 정의읍성 남문. 김홍준 기자

정의읍성이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는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한천,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가족 등이 유배 갔다. 사진은 정의읍성 남문. 김홍준 기자

정의읍성 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곽 앞에 유채꽃밭이 펼쳐지고 있다. 정의읍성이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는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한천,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가족 등이 유배 갔다. 김홍준 기자

정의읍성 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곽 앞에 유채꽃밭이 펼쳐지고 있다. 정의읍성이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는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한천,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가족 등이 유배 갔다. 김홍준 기자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의 정의읍성 남문 앞에 있는 돌하르방. 동, 서, 남문 앞에 각각 4기씩 총 12기가 있는데 성안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했다. 정의읍성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 대정읍성에도 있다. 1754년(영조 30) 김몽규 목사가 처음 만들어 삼읍의 성문 앞에 세우게 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홍준 기자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의 정의읍성 남문 앞에 있는 돌하르방. 동, 서, 남문 앞에 각각 4기씩 총 12기가 있는데 성안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했다. 정의읍성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 대정읍성에도 있다. 1754년(영조 30) 김몽규 목사가 처음 만들어 삼읍의 성문 앞에 세우게 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홍준 기자

“뱀 조심하래. 뱀.” 서울에서 와 ‘제주 한달살이’ 중인 김선일(59)씨가 시오름(760m)을 오르며 아내에게 말했다. 대정읍성과 정의읍성 사이의 시오름은 푹신한 숲길이 이어진다. ‘치유의 숲’으로 부른다. 곳곳에 ‘뱀 조심’ 간판이 있다.

제주 시오름(760m,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흥동 산1번지)은 편안한 숲길의 연속이다.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고, 데크와 흙길을 통해 쉽게 오름 정상에 다가설 수 있다. 숲은 어두울만큼 촘촘하니, 기온이 올라가는 계절에 찾으면 좋다. 정비가 잘돼 있어 오히려 자연의 맛을 떨어뜨린다는 평도 있지만, '치유의 숲'으로도 부를 정도로 건강한 숲과 상쾌한 공기, 가벼운 산책로로 인기를 얻고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성과 정의읍성을 잇는 도로 상의 중간 쯤에 자리잡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 시오름(760m,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흥동 산1번지)은 편안한 숲길의 연속이다.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고, 데크와 흙길을 통해 쉽게 오름 정상에 다가설 수 있다. 숲은 어두울만큼 촘촘하니, 기온이 올라가는 계절에 찾으면 좋다. 정비가 잘돼 있어 오히려 자연의 맛을 떨어뜨린다는 평도 있지만, '치유의 숲'으로도 부를 정도로 건강한 숲과 상쾌한 공기, 가벼운 산책로로 인기를 얻고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성과 정의읍성을 잇는 도로 상의 중간 쯤에 자리잡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의 당목잇당은 당산봉 밑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사당은 뱀을 모신 차귀당(遮歸堂)의 자리에 들어섰다. 차귀당은 조선 숙종 28년(1702년) 때 제주 목사?이형상이?태워버린 129개 사당 중 하나였다. 김홍준 기자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의 당목잇당은 당산봉 밑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사당은 뱀을 모신 차귀당(遮歸堂)의 자리에 들어섰다. 차귀당은 조선 숙종 28년(1702년) 때 제주 목사?이형상이?태워버린 129개 사당 중 하나였다. 김홍준 기자

『제주풍토기』와 『제주풍토록』에서는 제주민들의 민간신앙, 특히 뱀을 신으로 모시는 것을 께름칙하게 적고 있다. 제주시 한경면 당산봉(148m) 밑에 차귀당(遮歸堂)이 있었다. 뱀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광양당(廣壤堂)과 함께 제주의 큰 사당이었다. 조선 숙종 28년(1702년)에 제주 목사 이형상이 태워버린 129개 사당 중 하나였다. 현재 당못잇당이라는 사당이 차귀당 자리에 있다.

당산봉은 제주의 숨은 명소 중 하나다. 서울에서 친구와 함께 온 김모(26)씨는 “1시간이면 정상까지 가지만, 풍경이 발을 잡아 3시간 걸렸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제주올레 12코스에 속하는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당산봉을 오르내리는 동안 차귀도와 포구 풍경을 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주올레 12코스에 속하는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당산봉을 오르내리는 동안 차귀도와 포구 풍경을 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회은군(이덕인, ?~1644)도 인조 때 모반과 관련해 제주로 유배 간 왕족이다. 제주는 진작부터 정권 유지를 위한 유배의 섬으로 활용됐다. 원나라는 1273년 삼별초를 섬멸하고 약 100년 동안 제주도를 지배했다. ‘칸’ 계승을 둘러싸고 위협이 될 만한 왕족과 신하 170여 명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제주 유배의 초기 기록이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제압하면서 원나라의 왕족들을 탐라에 보내기도 했다. 1382년 원나라 양왕의 아들 백백 태자와 손자 육십노 등이, 1388년에는 원나라의 달달친왕과 왕족 80가구가 제주에 왔다. 이들은 제주 양·안·강씨(氏)의 입도조(入島祖·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라고 한다.

“자, 모여~.” 다시 제주시. 바다를 바라보는 연북정(戀北亭)에서 몇몇 가족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셀카 명소다. 유배인들이 임금을 그리워하고,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어명을 기다리며 찰랑하고 청량한 바다를 바라봤을 곳. 이처럼 예정된 시간 없이, 유배인들은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극형의 쓴맛을 본 게 아니었을까. 우린 비행기를 기다린다. 1시간이면 올라간다. 김정이 좋아했던 청귤이 익는 3월, 연북정 어귀에 꽃이 피었겠다.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연북정(戀北亭)은 유배인들이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군사시설인 망루의 역할을 했기에 유배인들이 드나들 수 없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정준희 기자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연북정(戀北亭)은 유배인들이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군사시설인 망루의 역할을 했기에 유배인들이 드나들 수 없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정준희 기자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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