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장악한 러…우크라 주력부대 옥죄는 '주요거점' 쥐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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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이 유럽 최대 원자력발전소인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원전을 포격 끝에 점령했다. 우크라이나 전력의 4분의1을 공급하는 자포리자 원전이 러시아 수중에 들어가면서 우크라이나의 전시 전력 차질이 우려된다.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정부 전략통신정보보안센터에 따르면, 자포리자 지방정부는 오전 8시20분경 “러시아 점령군이 자포리자 원전 부지를 장악했다”고 밝혔다. AFP통신에 따르면 원전 측은 "시설이 안전한 상태이며, 핵 안전도 보장됐다"고 전했다.

4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최대 원자력발전소인 자포리자 원전 포격 모습. 사진=우크라이나 전략통신정보보안센터 텔레그램, 뉴시스

앞서 러시아군은 이날 오전 1시쯤부터 자포리자 원전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원전단지 경계 바깥 5층 건물 등에 두차례 화재가 발생하면서 '체르노빌'과 같은 핵재앙 사태가 우려되기도 했다. 화재는 5시간 만에 진압됐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화재로 인한 사상자는 없으며, 원전 주변 방사선 수치도 정상 범위라고 밝혔다.

2009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결의안에 위배되는 핵 시설 무력 공격에 각계에서 규탄이 이어졌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트위터에 “자포리자 원전이 폭발할 경우, 체르노빌보다 규모가 10배는 클 것”이라며 “러시아는 즉각 폭격을 중단하라”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 외에 세계 어떤 나라도 원전을 향해 발포한 적이 없다”며 “러시아는 이제 핵 테러에 의존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푸틴의 무도한 행동은 유럽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에 원전 주변의 군사작전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러시아 국방부는 자포리자 원전 단지 공격이 우크라이나의 사보타주(의도적 파괴행위) 그룹의 소행이라며 이들이 먼저 공격했고 건물을 떠나며 불을 질렀다고도 주장했다.

러, 우크라 전역 전력망 통제권 장악

자포리자 원전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에네르호다르에 위치했다. 우크라이나 전체 원자로 15기 중 6기가 이곳에 배치됐다. 6기 모두 950메가와트(㎿)급 VVER-1000 가압경수로형 원자로다. 연간 최대 420억㎾h의 전력을 생산해, 우크라이나 전체 전기 사용량의 4분의 1을 공급한다. 단일 단지로는 유럽 최대 규모이자, 세계 10대 원자력 발전소 중 하나다.

유럽 최대 원전 시설 자포리자.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우크라 주력부대 포위, 보급망 차단 가능성↑

특히 우크라이나를 종단하는 드니프로(드네프르)강 앞에 위치해 있어 러시아로선 우크라이나의 수송 동맥을 끊는 ‘주요 거점’을 확보한 셈이 됐다. 전 미국 육군 중장인 웨슬리 클락은 “러시아군이 드니프로 강을 장악하면 강 동쪽에 있는 우크라이나 주력 부대를 포위할 수 있다”고 CNN에 말했다. 수도 키이우에서 동쪽과 남쪽의 도시로 물자를 공급하는 주요 통로를 차단할 수도 있다.

러시아군은 드네프르 강 동쪽에서는 우크라이나 제2 도시 하르키우와 아조프해 핵심 항구도시인 마리우폴 등을 둘러싸고 무차별 공격 중이다. 미국 국방부의 한 관리는 러시아가 하르키우와 마리우폴을 장악한다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서부와) 분리시킬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군사시설이 러시아군의 공격에 파괴됐다. 연합뉴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속전속결 때는 군사시설만을 정밀 타격해 민간 피해를 최소화하지만, 장기전에 접어들면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민간인 피해를 키워 전의를 꺾는 전술을 사용한다"며 "러시아군이 자포리자 점령을 통해 장기전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