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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지킬것" 싸우는 우크라女…"집 가고파" 사기 꺾인 러 병사

중앙일보

입력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한국교육원에서 근무하는 임길호(51) 실장이 전쟁 발발 후 키이우 상황을 2일(현지시간) 중앙일보에 e메일로 보내왔다. 우크라이나에서 22년째 거주하고 있는 임 실장은 한국 대사관의 대피 권유에도 불구하고 사정상 현지에 남았다가 발이 묶였다. 임씨가 전해온 현지 소식을 일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시민들 ‘나라 지킨다’ 저항정신 대단 

지난 1일 키이우 거주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화염병을 만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1일 키이우 거주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화염병을 만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오늘도 별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1일 하르키우 시내에도 공습이 이뤄지면서 키이우도 뒤숭숭하다. 어디로 폭격할지 몰라 불안하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임길호의 키이우 일기 ②] 포격 속 키이우 현장에서

우크라이나인의 저항 정신은 실로 대단하다. 먼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명분이 확고하다. 2일 통행금지 시간이 아닌 낮에 밖에 나갔는데, 젊은 청년은 물론 여학생까지 키이우의 대로를 지키고 있었다. 전세가 기울어도 우크라이나인은 끝까지 '파르티잔(partisan·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유격대원)'이 돼 싸울 것이라는 전의가 보인다.

반면 러시아군은 사기가 꺾이고 있다. 이번 전쟁을 왜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왔단다. 포로가 된 러시아의 20대 초반 병사는 "훈련 명령으로 어디인지 모르고 도착하니 우크라이나였다. 부모님께 연락드리고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물자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아 식량이 부족해 상점에서 식품을 약탈하고 있다. 이런 소식을 러시아는 잘 모를 것이다.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하며 보도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 무력으로 다룰 나라 아냐 

우크라이나 시민군이 2일 키이우 외곽 북써쪽 호렌카를 지키고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시민군이 2일 키이우 외곽 북써쪽 호렌카를 지키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번 전쟁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오판이다. 우크라이나는 무력으로 다룰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최근에 많은 젊은이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다른 서유럽 나라로 취업하면서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을 잘 알고 있다. '복싱 영웅'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도 독일에서 오래 선수 생활을 해서 친서방 성향이다. 독일의 좋은 점을 우크라이나에 도입하고 싶어하는데, 최근에는 지하철도 카드로 결제하고 있다.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 미국 등 서방 국가가 전면전을 경고해도 우크라이나의 많은 사람은 믿지 않았다. 러시아에 친인척이 많고 러시아어도 잘해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이름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전쟁으로 더욱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과거 소련 시대(1922년 12월~1991년 12월)에 살았던 세대다. 50대 이상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소련 시대와 함께하면서 러시아를 친근하게 느낀다. 그런 러시아가 쳐들어와 심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양국 역사에 돌이키기 힘든 오명을 남기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 희생자 호명 울먹  

지난 1일 키이우에서 외신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일 키이우에서 외신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전쟁 발발 이후 국민과 함께 하고 있다. 암살 위협에도 수도 키이우를 지키고 있다. 연설할 때 전장에서 죽은 희생자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면서 감사와 애도를 전하며, 울먹거리는 모습은 우크라이나인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9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국민을 슬프게 하지 않겠다. 웃음이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코미디언 출신이어서 정치를 모른다고 하지만, 그는 정치 풍자를 잘하는 코미디언이었다. 나도 종종 농담으로 따라 했다. 급하게 정당을 만드느라 경력이 부족한 이들을 참모로 기용해 비판받았지만,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등 서민적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정말 씁쓸한 건 러시아를 자극하는 말을 일삼던 서부 지역의 극우 정치인이 전쟁이 나자 사라진 것이다. 다들 어디에 숨어 있는지 궁금하다. 난생처음 전시 상황을 경험하니 평화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다. 3일부터는 키이우 장악을 위해 러시아군이 더욱 과격하게 공격할 것 같은데 부디 더는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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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호의 '키이우 일기'

임길호 실장은 대학에서 국제지역학을 공부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외관계가 핵심 전공이다. 지난 2월에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북방물류리포트에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나토 가입 전망' 칼럼을 썼다. 러시아 침공 이후 급박한 현지 상황을 담은 1편에 이어 2편에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관계 등에 대해 전했다.
임 실장이 근무하는 우크라이나 한국교육원은 한국 교육부에서 외교부와 협의해 2017년 3월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의 부속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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