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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중 정치인 심으려 했다" 중국 선거 개입 폭로로 난장판 된 호주

중앙일보

입력

정글

중국이 한국 정치인을 매수해서 선거에 출마시킨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영화에서도 나온 적 없는 시나리오가 호주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지난달 9일 호주 대간첩 안보 기구인 국가안보정보원(ASIO)은 중국의 선거 개입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ASIO 마이크 버지스 원장은 “최근 호주 총선을 앞두고 한 외국 정부 기관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치인을 심으려고 시도한 것을 발각했다”며 “그들이 선거에 간섭하려는 음모를 저지했다”고 밝혔습니다.

마이크 버지스 ASIO 원장은 9일 호주 캔버라의 본부에서 "해외 정부가 유인책에 취약한 호주의 총선 후보에게 불법 자금을 지원하려 했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마이크 버지스 ASIO 원장은 9일 호주 캔버라의 본부에서 "해외 정부가 유인책에 취약한 호주의 총선 후보에게 불법 자금을 지원하려 했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버지스 원장은 당시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호주 안보 관계자들은 중국 스파이가 호주 뉴사우스웨일즈주에 출마하는 노동당 후보를 매수하려 했다고 호주 언론에 전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사업가가 호주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후보에게 선거자금을 제안했다는 거죠. 버지스 원장은 “외국의 스파이 활동을 테러리즘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국 출신 사업가가 국회의원 후보에게 접근해 돈을 대주려던 걸 국정원이 잡아낸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에 대해 중국 당국은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중국 스파이 의혹이 몰고 온 소용돌이

이 스캔들 이후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오는 5월로 예정된 호주 총선을 ‘반(反)중국전’으로 규정하고, 연일 노동당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모리슨 총리는 야당인 노동당의 앤서니 앨버니즈 대표를 두고 “중국 정부가 심은 인물”이라고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앨버니즈 대표는 “이번 스캔들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면서 “호주 안보를 들먹이며 선거에 개입하려는 술수”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여당은 노동당을 중국의 첩자 취급하고, 야당은 이를 선거공작으로 받아치는 형국입니다. 모리슨 총리는 오미크론 확산 이후 국내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지지율 연일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1월 말 기준 총리 국정 지지도는 39%로 2년 내 가장 낮은 수치입니다. 정당 지지율도 44 대 56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여당은 이번 스캔들에 사활을 걸고 포화를 퍼붓고, 노동당은 진땀을 빼며 수습 중입니다.

중국이 호주 선거에 개입하려 했다는 폭로가 나온 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오른쪽)는 야당인 노동당의 앤소니 알바니즈 대표(왼쪽)를 두고 "시진핑이 심은 인물"이라며 강하게 공격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이 호주 선거에 개입하려 했다는 폭로가 나온 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오른쪽)는 야당인 노동당의 앤소니 알바니즈 대표(왼쪽)를 두고 "시진핑이 심은 인물"이라며 강하게 공격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호주는 의원내각제 국가로 총선 결과에 따라 대개 다수당 대표가 총리 자리에 오릅니다. 스콧 모리슨 총리는 ‘친미반중’의 외교 노선을 내건 지도자로 미국과 군사동맹을 단단히 하며 중국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도 국가 지도자 중 가장 먼저 우한 현지를 직접 조사해야 한다면서 중국을 비난했던 인물입니다. 중국이 가장 꺼리고 불편해하는 국가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따라서 호주 총선 결과에 따라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 호주 정부의 외교 노선도 달라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의 조용한 침공』의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 호주 찰스스터트대 교수는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다고 외교 노선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겠지만, 현 정부 아래에서 이뤄진 강력한 반중국 정책들이 상당히 완화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이번 스캔들과 관련한 청문회에선 중국 출신으로 호주에 귀화한 자우작윙(周澤榮)이 배후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발언도 나왔습니다. 자우작윙은 1949년 중국 광둥성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1999년쯤 호주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자우는 호주에서 매우 유명한 자선사업가로 사회적 명망이 높은 사람입니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호주 주요 정당에 400만 호주달러(약 35억원), 대학에 4500만 호주달러(약 390억원)를 기부했습니다. 호주 역사상 가장 큰 기부자 중 한 명입니다. 호주 시드니대학엔 그의 이름을 붙인 박물관이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자우작윙이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도 등장했다. 정글 화면 캡처

자우작윙이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도 등장했다. 정글 화면 캡처

그런데 2018년 그의 진의를 의심케 하는 일이 폭로됐습니다. 존 애쉬 UN 총회 의장의 뇌물 수수 사건 관련인으로 FBI 조사를 받은 전력이 드러난 거죠. 2013~2014년 의장을 맡았던 애쉬는 당시 마카오 부동산 개발업자, 중국 기업인으로부터 130만 달러(약 15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자우는 중국 정부와 관련됐다는 사실 자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량한 사업가가 중국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점점 커지는 상황입니다.

호주 젊은 정치인을 망친 중국의 검은 손

중국은 호주 정치인을 매수해 호주 정계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시도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호주 노동당의 샘 데스티에리 의원은 2014년부터 중국 공산당과 관련 있는 중국 출신 사업가에게서 여러 가지 후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아왔습니다. 소송 비용을 지원받고, 중국 여행을 후원받았으며 고급 와인을 선물 받기도 했죠. 그는 그 대가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중국 편을 들었고, 중국의 국익에 유리한 태도를 취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상하이 샘’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이 붙었죠.

이란계 이민자 2세인 샘 데스티에리는 30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촉망받는 노동당 소속 정치인이었다. 그는 중국과의 유착한 정치인이라는 근거가 쏟아져 나오면서 사퇴 압력이 거세졌고, 2018년 1월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EPA=연합뉴스

이란계 이민자 2세인 샘 데스티에리는 30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촉망받는 노동당 소속 정치인이었다. 그는 중국과의 유착한 정치인이라는 근거가 쏟아져 나오면서 사퇴 압력이 거세졌고, 2018년 1월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EPA=연합뉴스

그러다 2017년 자신의 후원자인 중국인 재벌에게 “호주 정부가 당신의 핸드폰을 도청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귀띔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국가 안보보다 자신의 돈줄을 더 챙기는 모습을 본 호주 국민이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는 결국 2018년 1월 의원직을 사퇴했고, 사실상 호주 정계에서 영구 퇴출당했습니다. 호주는 재발을 막기 위해 외국인 정치 후원금 기부를 제한하고, 외국 정부 로비스트가 내정에 간섭하면 형사처벌하는 법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해외 스파이 활동과 공작을 담당하는 곳은 통일전선공작부입니다. 시진핑은 이 조직을 마법 무기라고 부르며 “공산당의 비전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부서”라고 띄웠죠. 과거 통일전선은 수백명 규모의 작은 부서였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수만 명을 거느리는 거대 부서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5개 직속 기관 중 하나로 위상이 높습니다.

지난해 4월 베이징 중남해 바로 서쪽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중앙통일전선공작부 건물 정문. 건물 간판 없이 ‘푸유제(府右街) 135호’라는 주소만 걸려있다. 통일전선은 중국의 해외 공작 업무를 담당한다. 최근 들어 여러 나라에서 터지고 있는 중국 스파이 스캔들의 배후 조종 집단으로 지목된다. 사진=신경진 기자

지난해 4월 베이징 중남해 바로 서쪽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중앙통일전선공작부 건물 정문. 건물 간판 없이 ‘푸유제(府右街) 135호’라는 주소만 걸려있다. 통일전선은 중국의 해외 공작 업무를 담당한다. 최근 들어 여러 나라에서 터지고 있는 중국 스파이 스캔들의 배후 조종 집단으로 지목된다. 사진=신경진 기자

호주 안보기관이 파악한 통일전선의 해외 공작 수법은 ‘3C’로 요약됩니다. 비밀리에 접근해 포섭하고(Covert and Coopt), 돈을 줘서 부패시키며(Corrupting), 약점을 잡고 압박하는 겁니다(Coercive). 샘 데스티에리의 사례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요즘 호주 국가안보정보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틴더·범블·힌지 등 데이팅 앱을 통해 유력인사의 정보를 빼돌리거나 접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표적을 정하면 정치인, 기자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친중 성향이 있는 이들을 선별하고,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 위주로 접촉한다고 합니다.

해밀턴 교수의 설명입니다. “호주 국회의원 중 상당수가, 특히 노동당 의원이 주로 중국의 통일 전선 공작원에 의해 몇 년간 영향을 받아온 증거가 속속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중국인 커뮤니티와 저명한 중국계 사업가를 활용해 정치인을 포섭하는 동시에 자금의 출처도 숨겨 왔습니다.”

전 세계에 뻗치고 있는 중국 스파이 공작

중국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중국의 대외공작은 세계 곳곳에서 전례 없이 넓고 깊숙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2019년 일본에선 집권 자민당의 아키모토 쓰카사 의원이 중국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중국 온라인 도박업체 500.com으로부터 370만엔(약 3800만원) 뇌물을 받은 혐의입니다.

아키모토는 아베 정부 아래에서 카지노를 포함한 리조트 사업 정책을 맡은 인물입니다. 당시 아베 정부는 일본의 경제성장을 위한 새로운 사업으로 카지노와 리조트 육성을 내걸었죠. 중국인을 불러들여서 국부를 창출하려고 했던 겁니다.

아키모토 쓰카사 의원이 지난해 9월 도쿄법원에서 열린 뇌물 사건 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그는 중국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징역 4년의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이 스캔들로 스가 요시히데 총리도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AP=연합뉴스

아키모토 쓰카사 의원이 지난해 9월 도쿄법원에서 열린 뇌물 사건 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그는 중국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징역 4년의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이 스캔들로 스가 요시히데 총리도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AP=연합뉴스

사실 일본은 이전까지 이런 정치 스캔들이 중국과 연루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엄격한 정치자금법을 운용하며 폐쇄적 정치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2018년 발간된 일본 정치스캔들 사례집에서 중국이 언급된 건 단 2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계는 이번 사건 이후 중국의 정치 개입 시도가 빈번해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매년 크고 작은 중국 스파이 사건이 계속해서 터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노벨상 후보로 지목되는 찰스 리버 하버드대 화학과 교수가 중국으로부터 월급 5만 달러(약 6000만원), 생활비 16만 달러 (약 1억9000만원)를 몰래 받고 중국 정부를 위해 연구를 한 혐의로 구속됐죠.

2020년엔 중국 스파이가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민주당 정치인에게 접근했다는 폭로가 나왔습니다. 크리스틴 팽이라는 중국 출신 젊은 여성이 폭넓은 인맥과 개인적 매력, 심지어 성관계까지 이용해 민주당의 촉망받는 정치인에게 접근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도 크리스틴 리라는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있는 여성이 영국 전 노동당 의원에게 정치자금 모금을 지원하는 등 정계에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영국 국내정보기관 MI5는 지난 1월 중국 공산당이 한 여성을 통해 의원들에게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밝혔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국내정보기관 MI5는 지난 1월 중국 공산당이 한 여성을 통해 의원들에게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밝혔다. 로이터=연합뉴스

이 때문에 중국의 정치인 매수, 선거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각 국가는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미국 국가정보국은 중국ㆍ러시아 등 다른 나라의 선거 개입에 대비해 전담 책임자도 임명했습니다. 지난해 말엔 CIA도 중국 전담부서를 창설하고 중국의 스파이 활동에 강력하게 대응하기로 했죠. 영국 국내정보국(MI5)도 의회에 중국 스파이 경계령을 내렸습니다.

그럼 왜 우리나라엔 중국의 정치 개입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 걸까요. 해밀턴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국의 방해 공작과 정치 개입은 매우 교묘해서 마법처럼 대중에게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오랜 기간 한국 정치에 구조적으로 침투해 영향을 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다른 모든 나라에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만 예외일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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