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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노력한 기사는 있어도 더 힘들게 공부한 기사는 없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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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 바둑기사 신진서 9단. 저 손으로 세계를 재패했다. 손가락이 유독 길고 가늘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세계 최강 바둑기사 신진서 9단. 저 손으로 세계를 재패했다. 손가락이 유독 길고 가늘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월 26일 한·중·일 바둑 삼국지라 불리는 농심신라면배에서 한국이 우승했다. 극적인 역전 우승이었다. 최종 주자 신진서가 중국과 일본의 최정예 기사 4명을 차례로 물리치고 통렬한 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코로나 사태로 지친 데다 베이징 올림픽의 열 받는 판정으로 우울했었는데, 신진서가 한 방에 날려줬다. 2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한국 바둑의 새 구세주 신진서 9단을 만났다. 훤칠한 청년이 꾸벅 인사를 해왔다.

한국바둑 새 구세주 신진서 9단

일인자의 일상  

3월 2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인터뷰 중인 신진서 9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3월 2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인터뷰 중인 신진서 9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생각보다 키가 크다.  
180㎝ 정도 된다. 몸무게는 65∼69㎏인데, 2월 큰 대국을 여러 번 치르면서 3∼4㎏ 빠졌다. (이세돌 9단은 대국 전에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 했는데) 난 먹어야 한다. 아침에 어머니가 속 편한 음식으로 해주신다.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고 어렸을 때부터 치킨을 잘 먹었다. 술도 잘 안 마신다(신진서는 대국 중간에 바나나를 자주 먹는다. 승세를 굳혔을 때 바나나 먹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여러 번 잡혀 바둑 팬은 ‘승리의 바나나’라고 부른다. 막상 본인은 “살려고 먹는다”고 비장하게 답했다. “너무 힘들어 약간 정신이 없을 때 뭐라도 먹는다”고 말할 땐 안쓰럽기도 했다).
일과가 궁금하다.
늦게 일어난다. 오전 10시쯤. 집이 한국기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코로나 사태 전에는 매일 기원에 나왔다. 요즘엔 집에서 잘 안 나온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바둑 공부를 한다. 잠은 새벽 1시쯤 잔다. TV도 밥 먹을 때 빼곤 안 본다. 넷플릭스 같은 것도 없다. 여행도 시간이 없어서….

현재 신진서는 세계 최강이다. 비공식 순위이긴 하나 바둑 통계 사이트 ‘고레이팅(Go Ratings)’에서 2019년 1월부터 1위를 지키고 있다. 한때 중국에 밀렸던 한국 바둑은 신진서의 등장 이후 활력을 되찾았다. 2022년 신진서의 성적은 18승 3패다. 승률은 85.71%(3월 3일 현재). 세 번의 패배 모두 국내 선수에게 당했다. 신진서는 지난해 6월 8일 이후 외국 기사에 진 적이 없다. 모두 28번을 내리 이겼는데, 그중에서 중국 기사에게 23번 이겼다. 돈도 많이 벌었다. 2020년과 2021년 연속 상금이 10억원이 넘었다. 돈은 부모가 관리한다. 신진서에겐 신용카드 한장이 전부다. 딱히 돈 쓸 데가 없다고 했다.

바둑은 재미있다

신진서 9단이 네댓 살 적 사진. 신진서의 부모는 부산에서 바둑학원을 했었다. 어린 신진서는 바둑돌을 갖고 놀다 바둑을 배웠다. 사진 한국기원

신진서 9단이 네댓 살 적 사진. 신진서의 부모는 부산에서 바둑학원을 했었다. 어린 신진서는 바둑돌을 갖고 놀다 바둑을 배웠다. 사진 한국기원

신진서는 2000년 3월 17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직 생일이 안 지나 21세 11개월이다. 부모가 부산에서 바둑학원을 했었다. 어린이집이 싫었던 아이는 바둑학원에서 바둑돌을 갖고 놀며 컸다. 신진서는 네 살부터 바둑을 뒀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 4관왕에 올랐다. 부산에 살던 가족은 2012년 2월 서울로 이사 온다. 오로지 신진서 때문이다. 그해 7월 신진서는 영재바둑대회를 통해 입단한다. 신진서는 2000년생 첫 프로기사다.

초등학생 시절 하루 일과표가 화제가 된 적 있다. 밤마다 인터넷 바둑을 두는데 ‘지면 이길 때까지 둔다’고 했었다.
지는 게 싫었다. 10판 넘게 두고 잔 적도 많다. 요즘은 그렇게 안 한다. 우선 옛날처럼 인터넷 바둑을 자주 두지 않는다. 그리고 요즘은 거의 지지 않는다(신진서는 가공할 승부사다. 2월 중국 양딩신 9단과의 LG배 결승 1국에선 승률이 1.5%까지 떨어졌던 바둑을 뒤집었다. 신진서는 지금도 패배가 싫다고 말했다. “바둑은 승패가 확실히 정해지는 것입니다. 패배가 쌓이면 무뎌지는 게 아니라 무력감이 커집니다.”).
천재형인가 노력형인가.
재능은 있었던 것 같다.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보다 더 노력한 기사는 있을지 몰라도 나보다 더 힘들게 공부한 기사는 없을 것이다. 부산에 살 때 대회에 나가려면 서울에 왔다 가야 했다. 정말 힘들었다. 재미가 없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신진서는 어렸을 때부터 인생이 정해졌다. 최종 학력도 중학교 1년 중퇴다. 그는 “졸업장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며 “후회는 안 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바둑이 재미있나.
재미있다. 재미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다. 물론 어렸을 때와 바둑을 대하는 자세는 다르다. 지금은 책임감을 느낀다. 1위로서의 책임감이라기보다는 직업으로서의 책임감이다. 바둑을 소개할 때 나는 늘 바둑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물론 롤 게임보다는 재미없을 것이다. 바둑도 알고 보면 재미있다. 바둑이 오랜 세월 보전될 수 있었던 건 바둑이 재미있어서다. 
선배 기사들에게 배운 게 있다면.
이창호 9단에겐 부동심을 배웠고, 이세돌 9단에겐 카리스마를 배웠다.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건 박정환 9단이다. 바둑도 많이 배웠지만, 바둑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그는 바둑에 늘 진심이다(한국 바둑에서 신진서는 스승이 없는 기사로 알려졌다. 충암도장 출신이라지만, 도장에 다닌 지 5개월 만에 입단했다). 
2013년 1월 촬영한 소년 신진서. 프로기사가 되고서 6개월쯤 지났을 때 얼굴이다. 얼굴에 장난기가 묻어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13년 1월 촬영한 소년 신진서. 프로기사가 되고서 6개월쯤 지났을 때 얼굴이다. 얼굴에 장난기가 묻어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정환과의 역대 전적은 28승 22패로 신진서가 앞선다. 2019년까지는 2승 10패로 신진서가 일방적으로 당했다. 2020년엔 14승 2패로 신진서가 압도했다. 박정환의 시대가 저물고 신진서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싶었는데, 2021년 12월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박정환이 신진서를 꺾고 우승했다. 대국이 끝난 뒤 패자가 승자의 자리를 찾아가 복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국에선 박정환이 신진서를 찾아갔고, 2국과 3국에선 신진서가 박정환을 찾아갔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말하자 신진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세계대회 결승전이라지만, 우리는 늘 수시로 물어봅니다.” 깜빡했다. 신진서와 박정환은 적수이기 전에 동료였다.

2021년 12월 삼성화재배 결승 최종국 후 복기 모습. 승부에서 패배한 신진서 9단이 승리한 박정환 9단을 찾아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21년 12월 삼성화재배 결승 최종국 후 복기 모습. 승부에서 패배한 신진서 9단이 승리한 박정환 9단을 찾아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당면 목표 커제

신진서의 최대 라이벌은 커제 9단이다. 중국 1위인 데다 상대전적도 7승 11패로 커제가 앞선다.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 기록도 신진서가 모자라다. 신진서는 3회, 커제는 8회다. 10년 전 프로기사가 됐을 때 신진서의 목표는 세계대회 우승이었다. 현재 목표를 물었더니 신진서는 “세계대회에서 커제보다 더 많이 우승하고 싶다”고 말했다.

2월 25일 농심신라면배 커제와의 대국이 큰 화제가 됐다. 한·중 최강자의 대결이었는데 초반부터 너무 일방적으로 끝났다. 복기한다면.
커제의 초반 포석을 공부했는데 그대로 진행돼 쉽게 이길 수 있었다(놀라운 답변이다. 커제가 흑이었기 때문이다. 초반 진행은 흑이 주도한다. 커제의 포석을 모두 예상하고 대비하려면 얼마나 많은 연구가 필요했을까. 초반 36수가 진행될 때까지 신진서는 불과 33초만 사용했다).
대국이 끝난 뒤 커제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켰다.
커제가 틀린 얘기를 했다. 내가 화장실을 자주 갔다고 했으나 나는 화장실을 자주 가지 않았다. 커제가 말한 내 인공지능 일치율도 맞지 않는다. 그날 내 바둑의 인공지능 일치율은 65.8%였다. 그러나 커제는 71%라고 말했다. 이 차이는 크다. 일치율 65%는 내가 다섯 판 두면 한 판정도 나오는 수치고, 70% 이상은 100판을 둬야 한두 판 나올까 하는 수치다. 커제는 내 일치율이 지나치게 높다고 말해 내가 부정행위를 한 것처럼 오해를 일으켰다. ‘알파고보다 센 것 같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으로 느껴져 불쾌했다. 그날 커제의 일치율은 겨우 49%였다. 그날은 내가 잘 두기도 했지만, 커제가 못 뒀다. 내가 커제보다 세면 셌지 약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건 문제 될 게 없다.
커제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실력은 인정한다. 다만 중국 일인자인 만큼 바둑 외적인 것에 대해서도 진중한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커제 발언 이후 중국에서 약 500통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중에서 95%는 응원 메시지였고 5% 정도만 비난과 욕설이 있었다. 중국 팬도 커제 발언이 잘못됐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커제랑 끝장 승부를 내는 건 어떨까. 이세돌도 구리와 10번기를 했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올해 안에 커제와 10번기가 마련된다면 무조건 하겠다. 딴말 안 나오게 하려면 대면 대국이어야 할 것이다. 바둑 활성화를 위해서도 좋은 이벤트가 되리라 믿는다. 

인공지능의 취향 

3월 2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신진서 9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3월 2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신진서 9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코로나 사태로 대면 대국이 사라졌다. 인터넷 바둑과 어떻게 다른가. 
대면 대국은 경험 많은 기사가 유리하다. 현장 기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터넷 바둑에선 그런 게 없다(신진서는 종종 바둑 사이트에 접속해 인터넷 바둑을 둔다. 그가 나타났다고 하면 바둑 팬이 우르르 몰려간다. 그의 아이디는 ‘카운트다운’이다).
인공지능으로 어떻게 바둑을 공부하나
인공지능과는 자주 대국하지 않는다. 대신 인공지능 추천 수를 계속 둬 본다. 인공지능이 왜 이 수를 추천하는지 이유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인공지능이 출현한 뒤 바둑이 삭막해졌다는 평도 있다. 인간이 두는 바둑엔 기풍이 있는데, 인공지능의 바둑엔 정답만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인공지능에도 기풍이 있다. 가령 인공지능 승률 50%의 수가 있다고 하자. 옆에 49.9%의 수가 있고, 또 옆에 50.1%의 수가 있다. 어디를 두든 승률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바둑은 전혀 다르게 바뀐다. 나는 이 차이가 기풍의 차이라고 이해한다.   
인공지능도 발전을 거듭해왔다. 인공지능과 상대한다면 어떨까.
이세돌 9단은 ‘알파고 리’ 버전과 상대해 1승 4패를 했다. 커제는 알파고 리 버전보다 진화한 ‘알파고 마스터 버전’에 세 번 모두 지고 울었다. 내가 마스터 버전과 상대한다면 세 점은 깔아야 할 것 같다. 내가 알파고와 공식 대국을 두는 건 의미가 없다. 접바둑을 둬야 해서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실력 차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올 9월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에 바둑이 들어있다. 남녀 단체전과 남자 개인전 세 종목이다. 신진서는 사실상 출전이 확정됐다. 남자 기사 6명이 출전하는데 랭킹 1, 2위는 자동 출전이다.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겠다고 했더니 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병역 혜택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아시안게임을 통해 바둑을 알리는 겁니다.” 대답에서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바둑을 업으로 알고 사는 장인의 책임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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