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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우크라 탈출, 안전 담보 없다" 교민 555km 대피 작전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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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국경도시 프셰미실은 2일 새벽부터 구급차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로 요란했다. 대략 3분 간격으로 이어졌다. 국경으로 몰려드는 피란민은 줄지 않고 오히려 불어나고 있다. 지난 1주일 동안 우크라이나를 벗어나 폴란드로 온 피란민 수만 45만 명. 폴란드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1일부터는 접경지역 검문소 8곳 모두에서 차량 뿐 아니라 도보로 통과하는 것도 허용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우크라-폴란드 접경을 가다④

지난 1일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폴란드로 빠져 나온 한 기자는 이렇게 전했다.

"차량이 막히자 중간에 내려 20시간 넘게 걸려 26㎞를 걸었다. 일단 우크라이나쪽 출국 게이트에 도착해 줄을 섰지만 3시간 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간신히 통과했더니 이번에는 폴란드쪽 입국 게이트 앞도 마찬가지.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가려고 뒤에서 몸을 밀고, 기력이 떨어져 주저앉고, 아이가 울자 엄마도 따라 울고, 경비병에 소리 지르며 항의하다 얻어맞아 얼굴에 멍이 생기고…, 아수라장이었지만 모두 필사적이었다."

폴란드 국영방송 TVP의 아나운서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리본을 달고 방송을 하고 있다. 김현기 특파원

폴란드 국영방송 TVP의 아나운서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리본을 달고 방송을 하고 있다. 김현기 특파원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잔류 중인 한국 교민을 탈출시키기 위한 긴급 작전도 이뤄졌다.

주 우크라이나 한국 대사관은 2일 아침 "오늘 오전 9시(한국시간 오후 4시) 라마다 앙코르 호텔에서 유엔(UN)기구 인솔 하에 몰도바로 출발하는 외교단 행렬에 합류하여 나간다. 무조건 9시 출발. 안전이 담보되거나 목적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며 키예프를 벗어나는 것이 1차 목표"라는 공지를 교민들에 보냈다.

현재 키이우 인근에 사는 교민 수는 1일 기준 17명. 이 중 6명이 대피에 합류했다. 다만 교민 일행은 당초 목적지로 알려진 몰도바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국경 도시 체르니브찌를 통해 루마니아로 건너 갈 것으로 전해졌다. 교민들을 루마니아로 보낸 대사관 공관원들은 우크라이나 체르니브찌에 남아 우크라이나 내 잔류 교민들을 지원한다.

우크라이나 서남쪽 루마니아 국경을 넘는 데는 대략 555㎞. 이날 선두 차량에는 김형태 주 우크라이나 한국 대사가 앞장섰다. 키이우 함락을 노리는 러시아의 공격이 더욱 맹렬해지고 있는 가운데 목숨을 건 '550㎞ 탈출작전'에 나선 것이다. 이날 탈출 길은 여러 검문소, 그리고 민병대 때문에 크게 정체돼 한국시간 기준 3일 오후쯤에야 도착할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교민과 인근 폴란드 교민들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선 이날 "무사 기원" "(떠나지 못하고) 남아 계시는 분들도 전원 무사하길!"이라는 응원 메시지가 오갔다.

2일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하리코프)에서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하리키우 국립대학 건물이 파괴되고 화재가 발생해 소방관들이 진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일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하리코프)에서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하리키우 국립대학 건물이 파괴되고 화재가 발생해 소방관들이 진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날 키이우 현지의 한 주민과 어렵게 연락이 됐다. 그는 조심스럽게 익명을 요청하며 이렇게 전했다.

"키이우의 모든 거리의 신호등은 모두 황색등이 점멸하고 있다.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2차 함락 공세 직전의 고요와 같다. 하지만 키이우의 고급호텔이나 웬만한 가정집에는 오랜 전쟁 경험 때문에 방공호가 비교적 잘 돼 있다. 요즘 며칠 사이 러시아 특수부대원 2000명이 키이우의 전기·수도 등 기본 인프라 시설을 파괴해 주민들의 불안감을 고조시키려 한다는 얘기들이 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결사 항전 의지에 우리 스스로 놀라고 있다. 공포감과 패닉에 빠지는 게 러시아가 원하는 바라는 걸 우리는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는 "러시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암살을 노리고 있겠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내 고려인들도 러시아에 맞서기 위한 민병대 조직에 나섰다. 키이우의 고려인 3세 니콜라이 첸은 "현재 우크라이나 안에만 고려인이 3000명 가량 있다"며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방탄조끼 마련 등 여러 방안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기 위한 시민들의 손길은 폴란드 여러 곳에서 이어졌다.

40대 폴란드 여성 카샤가 제공한 집에서 머무르고 있는 우크라이나인 가족. 김현기 특파원

40대 폴란드 여성 카샤가 제공한 집에서 머무르고 있는 우크라이나인 가족. 김현기 특파원

40대 폴란드 여성 카샤(왼쪽)는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 가족을 인계해 자신의 거처에서 쉬게 하고 있다. 김현기 특파원

40대 폴란드 여성 카샤(왼쪽)는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 가족을 인계해 자신의 거처에서 쉬게 하고 있다. 김현기 특파원

1일 밤 7시 프셰미실 중앙역 인근 '우크라이나 나눔의 집' 2층.

평상시에는 우크라이나 문화를 가르치고 각종 강습을 하는 장소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유입되면서 그들을 도우려는 폴란드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이곳에서 만난 40대 여성 카샤는 어린이 6명을 포함한 두 우크라이나 가족을 국경에서 인계해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묵게 했다고 했다. 함께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하며 심신이 지친 아이들을 돌봤다. 그는 "오늘 그들을 무료 열차 편으로 폴란드 서남부 오플레 지역으로 보내고 다시 숙박을 원하는 피란민을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다만 지원의 손길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생수·의류 등 물자가 넘쳐 나 일부 기관은 "우리는 더 이상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팻말을 붙여 놓는 곳도 있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르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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