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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청년 이어령 “왜 수레 타지 않고 지게 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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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시대의 지성’을 잃은 상실감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컸다. 지난 토요일, 이어령(1934∼2022) 선생의 부고가 전해졌다. 그의 암 투병이 알려지며 예고됐던 스승의 부재, 어른의 부재가 현실이 된 것이다.

애도 분위기로 꽉 찬 닷새였다. 부고 기사마다 그의 영면을 기원하는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렸고,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엔 조문객이 줄을 섰다. 추모 열기는 서점가로도 이어졌다. 온라인 서점 판매 순위가 껑충 뛰어오른 그의 책들이 ‘총알배송’으로 독자를 찾아갔다. 일찍이 그가 설파한 대로 그와 세상이 이별하는 방식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한 ‘디지로그’였다.

1963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길 넓힐 생각 왜 안 하나” 쓴소리
독재에 억눌린 민주주의 비판도
한평생 우상·파당 허물기 매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연재 당시의 이어령. 그의 나이 29세 때 사진이다. [사진 영인문학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연재 당시의 이어령. 그의 나이 29세 때 사진이다. [사진 영인문학관]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그의 첫 베스트셀러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꺼내 읽었다. 『메멘토 모리』『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등 죽음에 대한 고찰에 집중된 최근작 대신 ‘청년 이어령’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서였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1963년 8월부터 두 달여 동안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모음집이다. 맏딸 이민아 목사가 네 살 때였고, 둘째인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막 태어날 무렵이었다. 10년 전 딸을 암으로 잃은 그가 “원고 쓸 때 아이들이 ‘아빠’ 하고 부르면 흐름이 끊길까 봐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만 했다”며 후회했던, 바로 그 시간에 쓴 글들이다.

신문사가 제안한 제목 ‘한국 문화의 풍토’를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멋들어지게 바꿔놓은 그였지만, 정작 내용은 운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프 경적에 놀라 달아나는 시골 노부부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서문부터 서늘했다.

“그들이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 떼들이 차가 달려왔을 때 날개를 퍼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의의 재난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 왔을 때 그들은 언제나 가축과도 같은 몸짓으로 쫓겨가야만 했던 것일까.”

이런 냉정한 시선으로 그는 우리 문화와 정서의 본질을 꿰뚫었다. 윷놀이를 “윷가락 하나하나의 엎어지고 젖혀지는 운명이 서로 연결돼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놀이로 규정하며 “개인의 운명보다 파당이라는 서로 연관된 운명의 형세 밑에서 권력과 행운의 득실극(得失劇)이 전개”됐던 역사를 돌아보는 식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외치는 ‘사람 살려’를 두고는 “주체성을 상실한 구원의 개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영국인의 ‘헬프 미’, 일본인의 ‘다스케테쿠레’ 모두 ‘도와달라’는 뜻이라면서다. 수레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길에 순응해 지게를 만들어낸 문화도 비판했다. 왜 길 넓힐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지금 우리 현실(길)이 이러니까 민주주의를 행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의 길을 타개하여 ‘자유’의 수레가 다니도록 길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고 험준한 오솔길을 그냥 둔 채 독재의 그 무거운 지게를 사용하자는 사람들, 그 사고방식이 두렵기만 하다.”

1963년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104달러의 빈국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암울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2년 넘게 군정 체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억눌린 시대였지만 청년 이어령의 쓴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부터 그랬다. 알려진 대로 그는 스물두 살 때였던 1956년, 평론 ‘우상의 파괴’로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문단의 대부로 통했던 ‘무녀도’ 의 작가 김동리를 “대표적 우상”이라면서 신랄한 비판대에 세웠다.

“동리식 네오휴머니즘이란 인간 자체에 대한 철저한 미신과 우주에 대한 절대적 신비감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며, 그 미신과 신비는 오로지 깨어나지 못한 그의 복된 미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첫 등장부터 매서웠던 그는 그 반향이 부정적일 수 있다는 걸 각오하고 있었다. ‘우상의 파괴’ 끝부분에 “이 거룩한 우상들에 의하여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모진 형벌을 받을 것도 잘 알고 있다”고 적어 넣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그는 자신이 인기가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꼬마 때부터 인기가 없었다. 어린애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꼬투리를 잡았으니, 선생님들도 좋아했겠나”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그 판단만큼은 어긋난 것 같다. 한국의 대중은 그의 껄끄러운 쓴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만 해도 지난 59년간 한 차례도 절판되지 않고 250만 부 넘게 팔리며 인기를 누렸다. 출간 대기 중인 그의 유작 30여 편이 세상에 나올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