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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진공폭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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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사회에디터

장주영 사회에디터

살상무기는 모두 잔인하기 마련이지만, 진공폭탄(Vcuum Bomb)의 잔인함은 더욱 도드라진다. 폭발과 함께 충격파와 고온을 만들어내고 대기를 흡수해버린다. 산소를 빨아들이면서 주변을 일시적 진공 상태로 만들어 폭발 인근 지점의 생명을 지워버리는 셈이다. 이러다 보니 군사 전문가 사이에서는 핵폭탄을 제외한 폭탄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무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최근 진공폭탄을 사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옥사나 마르카로바 미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이 제네바 협약에서 금지하고 있는 진공폭탄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 중 인도적 대우에 관한 기준을 정한 국제법이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민간인은 물론 부상 중인 군인과 포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진공폭탄은 상대 병력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무차별적 피해를 줄 수 있다.

러시아가 실제로 진공폭탄을 사용했는지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황은 있다. 지난달 27일 미국의 CNN은 우크라이나 북동부 접경도시 하르키우 인근에서 진공폭탄 투하 작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로켓 발사대가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진공폭탄 사용이 사실이라면 전쟁범죄”라면서 국제사회의 조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조사를 예고한 상태다.

비극을 멈추기 위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협상은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달 28일 1차 면담에서 양측은 이렇다 할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등을 둘러싼 양측의 첨예한 입장과 이해관계를 한 번에 정리하긴 어렵기에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희생과 비극을 막기 위해서, ‘적어도 더 이상의 무력사용은 없다’는 약속을 러시아가 이른 시일 내에 내놓아야 한다.

전쟁을 고집한다면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러시아도 비극으로 빠져든다. 국제사회는 물론 러시아 내 시위대 역시 ‘반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에 이어 중립국 스위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상태다. 진공폭탄은 폭발지점 인근만 일시적으로 마비시키지만, 러시아의 고집은 국가 전체를 거대한 진공 공간으로 만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