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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 착한 놈, 이상한 놈…할리우드 기인들 몰려온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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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미국 영화 시상식 시즌에 맞춰 개성 강한 명감독들의 신작이 극장가를 찾아온다. 그중 지난달 23일 나란히 개봉한 ‘나이트메어 앨리’와 ‘시라노’, 그리고 ‘피그’의 독특한 캐릭터 열전이 눈길을 끈다. 차례로 ‘나쁜 놈’ ‘착한 놈’ ‘이상한 놈’에 빗댈 만하다. 낯선 삶에서 의미를 짚어내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스타들의 도전이 볼거리다.

◆‘공포 거장’ 떠오른 델 토로 감독=‘나이트메어 앨리’는 ‘판의 미로’ ‘헬보이’ 등으로 할리우드 공포 거장으로 떠오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악몽 같은 상상력이 생생한 작품이다. 물고기 인간과 청소부 여인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로 2018년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전작 ‘셰이프 오브 워터’의 낭만은 잊어라. 이번엔 괴물보다 더 추악한 인간들의 비뚤어진 초상을 그렸다. 오는 27일 시상식이 열리는 아카데미상의 작품·촬영·의상·프로덕션디자인 등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별난 주인공을 내세운 할리우드 영화 세 편이 나란히 개봉했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사기꾼 스탠턴.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별난 주인공을 내세운 할리우드 영화 세 편이 나란히 개봉했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사기꾼 스탠턴.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주인공은 수려한 외모의 빈털터리 청년 스탠턴(브래들리 쿠퍼). 유랑극단에서 독심술을 익힌 그는 심리학자 릴리스(케이트 블란쳇) 박사의 도움으로 뉴욕 최상류층 거물들에게 사기 행각을 벌인다. 유랑극단에서 데려온 연인 몰리(루니 마라)마저 위험에 빠뜨린다.

델 토로 감독이 30년간 영화화를 별렀다는 1946년 동명 소설이 토대다. 밀주와 신비주의가 판쳤던 미국의 대공황 시대 직후인 1940년대를 배경으로 죄의식 없는 욕망의 여정을 펼친다. 내내 눈비로 질척대는 비정한 밤 풍경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인기를 끌던 필름 누아르를 연상시킨다.

“당신이 속이는 게 아냐. 사람들이 스스로 속는 거지.” 릴리스는 달콤한 독약 같은 말로 스탠턴을 현혹한다. 블란쳇은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못지않은 유혹 연기를 선보인다. 돈에 눈먼 스탠턴의 오만방자함도 비호감이긴 마찬가지다. 차라리 그가 떠나온 유랑극단의 소박한 기인들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도 스탠턴을 끝까지 지켜보게 되는 건 브래들리 쿠퍼의 열연 때문이다. 병맛 코미디의 ‘행오버’부터 지질함과 광기를 오가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과 ‘리미트리스’까지 연기폭을 넓혀온 그다. 쿠퍼는 원래 스탠턴 역에 내정됐던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가 하차한 뒤 출연 제안을 받자 제작까지 겸하며 합류했다.

스탠턴의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주려고 촬영 중 약 7㎏을 감량했다. 델 토로 감독이 수십번 촬영을 각오했다는 후반부 ‘진실하고도 잔혹한 순간’을 단 한 번으로 끝냈다. 공허한 괴물이 된 스탠턴의 미친 듯한 웃음이 기억에 남는다.

‘시라노’의 용맹한 음유시인 시라노.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시라노’의 용맹한 음유시인 시라노.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조 라이트 감독의 시 같은 뮤지컬=‘어톤먼트’와 ‘안나 카레리나’를 연출한 조 라이트 감독의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를 무대로 엇갈린 사랑을 아름다운 노랫말로 풀어내는 뮤지컬 영화다. 대사 하나하나가 시다. 시인이자 검객의 삶을 그린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원작이다. 큰 코 탓에 짝사랑하는 여인인 록산에게 고백하지 못하다 연적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게 된 비운의 남자 이야기다. 이 작품에선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 등으로 낯익은, 키 132㎝의 왜소증 배우 피터 딘클리지가 시라노를 맡아 원작을 새롭게 해석한다. 록산 역은 헤일리 베넷이 맡았다. 미국 인디밴드 ‘더 내셔널’의 현대적 록감성 음악들이 고전 시대극에 어우러진다. 배우들의 가창력도 빼어나다. “난 멀리서 사랑해야 할 운명”이라 노래하는 딘클리지의 호소력 짙은 중저음이 귀에 달라붙는다.

영화는 각본을 맡은 에리카 슈미트의 동명 뮤지컬이 토대다. 무대에 올릴 때마다 잘생긴 배우가 가짜 코를 달고 시라노를 연기했다. 더욱 진실한 것을 고민하던 슈미트에게 남편인 딘클리지가 한번 읽어보겠다며 대사를 읊은 순간 새로운 시라노가 탄생했다. 딘클리지는 뮤지컬에 이어 영화의 주연까지 꿰찼다. 작품은 올해 아카데미 의상상 후보에 올랐다.

‘피그’의 괴짜 은둔자 롭 모습이다. [사진 판씨네마]

‘피그’의 괴짜 은둔자 롭 모습이다. [사진 판씨네마]

◆대배우를 깨운 신예 사노스키 감독=‘피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니콜라스 케이지의 폐인 같은 모습부터 충격적이다. 외딴 숲에서 돼지와 단둘이 송로버섯을 채취하며 살던 ‘롭’이 어느 날 괴한이 돼지를 훔쳐가자 찾아 나서는 얘기다. 15년 만에 도시로 돌아간 롭의 여정에는 묻어둔 인연들과의 상처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다.

지난 40년간 100편 가까이 출연하다 최근 슬럼프에 빠진 케이지의 복귀작이다. 라스베이거스·시애틀·샌디에이고 비평가협회 남우주연상 등 미국 시상식 시즌에서 연기상 13관왕에 올랐다. 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선 역대 출연작 최고 신선도(97%)를 받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트위터에 ‘올해의 영화’로 추천했다. 초기 출세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못지않은 전환점이 될 작품으로 입에 오른다.

“이름, 꿈, 인생…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야”란 대사는 케이지 개인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한다. 버라이어티 인터뷰에서 “몇 번의 흥행 실패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나를 외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며 “연기를 포기할 생각이 들 때마다 ‘꾸준히 하다 보면 다시 발견해줄 것’이라고 되뇌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의 각본·연출을 맡아 극영화에 데뷔한 신예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이 케이지에게 직접 출연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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