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한슬이 고발한다

20만명 중 97% 떨어진다…9급 공무원,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

중앙일보

입력

박한슬 약사 출신 작가

나는 고발한다. J’Accuse…!’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한 해 9급 공무원 시험 응시자가 약 20만 명이다. 배경은 공무원 임용 시험이 치러진 한 고교. 그래픽=차준홍 기자

한 해 9급 공무원 시험 응시자가 약 20만 명이다. 배경은 공무원 임용 시험이 치러진 한 고교. 그래픽=차준홍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해 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와 화상 대담을 했습니다. 당시 이 후보는 "각자 타고난 환경과 조건이 서로 다른데, 이들이 과연 동등하게 기회를 누렸다고 할 수 있냐"는 주장을 펴더군요. 샌델 교수가 책에서 한 주장처럼 ‘대입 추첨제’를 적용하는 게 더 공정할 수 있다는 말도 했죠. 샌델 교수는 "명문대에 입학한 엘리트 계층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며 수긍했고요. 그런데 저는 이 대담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로 임용됐던 노년의 백인 엘리트야 그럴 수 있겠지만, 흙수저 검정고시 출신으로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 정치를 펴겠다는 이 후보가 왜 굳이 ‘대입’ 공정성을 그처럼 강조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아서요.

관련기사

최근 5년간 국내 고등학생의 평균 대학 진학률은 71%입니다. 소득 수준이 낮은 집안 아이일수록 대학 진학률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30%는 가정환경이 나쁠 가능성이 큰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꼭 경제적 이유만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건 아닙니다. 국내 대학 진학률은 2008년 84%를 정점으로 꾸준히 하락해왔습니다. '반값 등록금' 운동의 성과로 대대적인 국가장학금이 도입되었는데도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걸까요. 그건 굳이 대학 입학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위 30%는커녕 아마 상위 10%나 관련이 있을 명문대 추첨 입학제 얘기가 대체 약자의 삶과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구심을 갖는 건 이런 이유입니다. 인서울 아닌 대학에 다니는 보통의 청년, 혹은 아예 대학에 다니지 않는 이들의 삶과 관련 있는 시험은 그 잘난 명문대 입시가 아니라 9급 공무원 시험(국가공무원 9급 공개경쟁채용)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으려면 명문대 입구에서 부정 출입하는 교수 자녀의 표창장 검사를 할 게 아니라,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전국 공시생을 지켜봐야 합니다.

지난해 8월 9급 공무원시험 응시생들이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면접시험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9급 공무원시험 응시생들이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면접시험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매년 20만 쏟아지는 ‘공시 낭인’

2021년에 9급 공무원 시험 원서를 접수한 인원은 20만 명입니다. 꾸준히 이슈화되는 변호사 시험 응시자가 기껏해야 3500명 남짓인 걸 고려하면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9급 공무원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최종 합격하는 숫자는 얼마일까요. 2021년 선발한 9급 공무원은 5600여 명입니다. 아무리 ‘허수’가 많다 해도 합격률 2.8%는 끔찍한 수치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건 9급 공무원시험 응시자 연령이 상당히 높다는 점입니다. 여야 대선 후보 모두 사법고시 출신이고 특히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9수를 했으니, 사시가 시행되던 시기의 ‘사시 낭인’이라 불리던 장수생을 모를 리 없습니다. 고시 낭인 양산으로 악명높았던 사법시험조차 폐지하기 6년 전인 2011년 응시 자료를 보면, 응시자 중 30대는 21%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2021년 9급 공무원 시험의 30대 응시자 비율은 무려 31%입니다. 이른바 ‘공시 낭인’이 '사시 낭인' 이상으로 많이 존재하는 겁니다.

자료: 인사혁신처, 박한슬

자료: 인사혁신처, 박한슬

상황이 이런데도 이들은 언론에 잘 드러나지 않고, 정치권도 주된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약자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진보 언론에서도 (더는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변호사 시험 5회 탈락자 중 사회적 약자 전형으로 입학한 이가 많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내지만, 눈을 낮춰 더 공시생 문제를 짚진 않습니다. 공정성을 얘기하지만 실은 한국 사회의 번듯한 성공 경로인 명문대 입시와 의사·변호사 같은 주요 자격·면허에만 관심이 쏠린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약자의 공정한 기회를 논하려면 저 구름 위 명문대가 아니라 9급 공무원 시험을 놓고 추첨을 먼저 얘기했어야 한단 겁니다.

변별력 타령 이제 그만 

아래 사진은 2021년 9급 공무원 시험에 출제된 한국사 문항 중 하나입니다. 혹시 여야 후보님들, 답을 아시겠습니까.

2021년 9급 공무원 시험에 출제된 한국사 문항

2021년 9급 공무원 시험에 출제된 한국사 문항

해설을 살펴보니 경천사 10층 석탑은 고려 29대 국왕인 충목왕 시기에 축조된 대리석 불탑이라고 합니다. 그 양식은 조선 7대 국왕인 세조 시기에 만들어진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고, 현재는 옛 원각사 위치에 종로 탑골공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긴 과정을 거쳐야 문제의 ‘왕’이 세조임을 알 수 있고, 조선 시대 왕의 업적을 줄줄이 꿰고 있어야 ‘6조 직계제’를 바른 답으로 골라낼 수 있습니다. 이런 시험에서 국어, 영어, 한국사를 거의 다 맞춘 다음 선택과목 2과목 역시 대부분 맞춰야 겨우 필기시험 합격선을 넘습니다.

솔직히 이 문제를 보기 전까지 충목왕이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매해 20만 명이 이런 시험 문제를 풀려고 고려 왕조 계보를 달달 외운다고 합니다. 장수생이 늘며 수험생 성적이 좋아지니, 오직 떨어뜨리기 위해 시험 문제가 이처럼 극악하게 어려워진 탓입니다. 이건 샌델 교수가 주장하는 능력주의의 문제도, 그리고 이재명 후보를 비롯해 진보 진영이 주장하는 것처럼 출발선이 달라 생긴 기회의 평등 문제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시험 외에는 능력을 측정하는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왕 이름을 외우는 능력이 9급 공무원의 직무 역량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요?

그래서 제안합니다. 9급 공무원시험에 추첨제를 적용합시다. 정상적인 공무원 업무를 수행하는 데 무리가 없을 최소한의 자격을 확인하는 수준의 난도로 시험을 보고, 자격 요건을 갖춘 이들만 추첨으로 뽑되, 사회와 대면하며 쌓은 경력 등에 가산을 주는 식으로 다면적 경력을 요구하면 어떨까요. 충목왕이 세운 석탑 이름을 알아 문제 하나를 더 맞춘 사람보단, 편의점 알바 석 달 하며 숱한 사람을 마주했던 경험이 청원인의 민원 수행을 하는 공무원의 직무에는 훨씬 더 도움 될 것이 자명합니다. 그의 출신 계층과 무관하게요.

지금 이 시각에도 가장 활발히 경제활동을 해야 할 시기의 노동 가능 인구 20만 명이 합격의 기약이 없는 ‘떨어뜨리려는 시험’에 묶여 있습니다. 여야 후보님들, 누가 당선되든 주목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는 취약계층 청년세대를 살펴주시길 희망합니다.

[정근하의 별별시각]공시 장수생, 노숙인만큼 열악하다

공시 낭인을 유발하는 현행 9급 공무원시험을 비판한 박한슬 작가의 글과 함께 보면 좋을 정근하 루터대 교수의 논문을 발췌, 소개합니다. 내용은 중앙일보 사이트(www.joongang.co.kr/series/11534) 박한슬 칼럼 하단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