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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봉급생활자를 봉으로 여긴 역대 정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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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올해 초 연말정산을 한 봉급생활자는 2000만 명 선이다. 인구의 40%. 600여만 자영업자의 세 배다.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일까. 세상에 순응하는 데 익숙해서일까. 봉급생활자가 똘똘 뭉쳐 집단행동한 경우는 드물다. 월급쟁이라고 낮잡아 불러도 별다른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월급 탈 때마다 세금은 또박또박 낸다. 연말정산 때 ‘유리알 지갑’이라며 푸념 좀 하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정부 입장에선 만만한 집단이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요긴하게 호주머니를 털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정부는 봉급생활자의 선의와 무기력을 십분 활용해 ‘보이지 않는 증세’를 계속해 왔다.

지난해 걷힌 근로소득세는 무려 47조2000억원. 2020년보다 6조3000억원 더 걷혔다. 지난해 취업자가 37만 명 늘고, 임금이 4.5% 올랐기 때문이라는 정부 해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 정도로 6조원 넘는 큰돈이 갑자기 생겼다니. 그런데 문재인 정부만 욕먹을 일도 아니다. 지난 10년간 근소세는 28조8000억원 늘었다. 증가 폭이 전체 세목(稅目) 중 1위다. 같은 기간 법인세(25조원), 부가가치세(19조원)보다 많이 늘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봉급생활자 호주머니에서 나온 근소세가 나라 살림을 떠받친 셈이다. 그 돈으로 역대 정부·국회는 물론 대선후보들이 자기 돈인 양 여기저기 풀면서 잔뜩 생색을 낸 것이다.

작년 근소세 47조, 10년 28조 늘어
15년째 구간동결, 세액공제 전환 탓
사실상 증세로 중산층 주로 피해
이·윤, 대책 관심 없고 돈 쓸 궁리만

근소세가 많이 늘어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우선 1200만~4600만~8800만원을 기본 틀로 하는 소득세 구간이 15년째 그대로다. 해마다 물가가 오르고 화폐가치가 떨어진다. 세율·구간을 그대로 두면 봉급생활자는 가만히 앉아서 세금을 더 물게 돼 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는 네 차례에 걸쳐 구간을 조정하고, 세율을 낮춰 근소세 부담을 덜어줬다.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근소세가 예산보다 56%나 더 걷혀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민심이 심상치 않자 세율을 10% 낮췄으나 구간은 손질하지 않았다. 증세를 근간으로 한 노무현 정부는 세금 깎아줄 생각이 없었다. 2007년 대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물가상승률에 따라 소득세 구간을 조정하는 물가연동제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화들짝 놀란 노무현 정부는 떠밀리다시피 구간을 소폭 상향 조정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이후 12년 만의 조정이었다. 그때 구간이 지금까지 계속된다.

각종 경비에 대한 공제가 줄어든 것도 근소세가 급증한 이유다. 최악의 개정은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비과세·감면을 줄인다며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꾼 것이다. 의료비·교육비·보장성보험료·기부금 등을 세액공제로 바꾸면서 공제액을 확 줄였다. 그만큼 근소세가 확 늘었다. 기부도 위축됐다. 세율 24% 구간(과표 4600만~8800만원)의 봉급생활자가 보험료 100만원을 냈다면? 소득공제 때는 24만원(100만원의 24%)을 돌려받았다. 세액공제로 바뀐 이후 절반인 12만원(100만원의 12%)만 돌려받는다. 사실상 증세였다.

증세는 진보 정부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런데 보수 정부가 봉급생활자 증세를 감행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조원동 경제수석이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게 깃털을 살짝 빼내는 것”이라고 비유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증세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세액공제 전환에 대해 2015년 초 연말정산 때 봉급생활자의 집단 반발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저소득층 세금을 조금 덜어주는 선에서 적당히 넘겼다. 근소세 증세는 고스란히 중산층 부담으로 남았다. 그 뒤로는 각종 경비를 알뜰하게 챙겨가며 연말정산을 해봐야 근소세가 별로 줄지 않았다. 깃털을 살짝 뺀 게 아니라 해마다 한 움큼씩 뽑은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바로잡지 않았다. 소득세 구간도, 세액공제도 그대로 뒀다. 봉급생활자의 고통을 외면했다. 대신 고소득자 구간을 쪼개 최고세율을 45%까지 높였다. 이를 고소득자 ‘핀셋 증세’라며 정의로운 일을 한 듯 홍보했다. 이걸로 배 아픈 건 좀 진정됐는지 몰라도, 배고픈 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근소세가 13조2000억원이나 불었다.

이재명·윤석열 대선후보는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정작 가장 큰 유권자 집단인 봉급생활자의 근소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TV토론이나 유세 현장에서도 뒷전이다. 15년째 묶여 있는 소득세 구간을 조정하겠다는 공약은 어디에도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개국이 도입한 물가연동제를 검토할 만한데, 거론 자체가 안 된다. 의료비·교육비 등에 비례해 근소세 부담을 덜어주려면 세액공제를 소득공제로 환원하는 게 맞다. 그게 어렵다면 현 12~15%의 세액공제율을 올릴 필요가 있다. 이 또한 논의 대상에 끼이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자녀세액공제 2배, 인적공제 26세 확대(이재명), 1인당 기본공제 200만원 인상, 공제 부양가족 25세 상향(윤석열) 정도의 공약이 나와 있다. 근본 처방이라기보다는 땜질 수준이다. 근소세 부담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대선후보들이 세금 덜어줄 방법은 찾지 않고, 거둔 세금으로 쓸 궁리만 하면서 벌어지는 슬픈 현실이다. 봉급생활자는 다음 정부에서도 봉(鳳) 신세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