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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러시아 제재를 보는 다른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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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26일 우크라이나 루간스크 지역 도로변에서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받고 파괴된 러시아군 탱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6일 우크라이나 루간스크 지역 도로변에서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받고 파괴된 러시아군 탱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5일 유엔본부 안전보장이사회에선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 주도의 우크라이나 침략 규탄 결의안에 러시아가 반대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 외에 친미 국가라는 인도·아랍에미리트(UAE)까지 기권표를 던진 까닭이다. 특히 미국·일본·호주와 함께 4개국 안보협의체 쿼드(Quad)를 결성한 인도가 기권했다는 사실은 서방에 큰 충격을 줬다. 러시아 매도와 제재에 반대하는 나라도 적지 않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인도·UAE 등 친미 국가 제재 반대 #북방정책 무산, 국내기업 타격 커 #미국에 동참 따른 보상 요구해야

인간은 흑백논리에 쉬 빠지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엔 미국 책임도 적지 않다. 1990년 동서독 통일 당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나토를 동진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랬던 미국이 최근 "나토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고 돌변, 전쟁의 불씨를 키웠다. 게다가 우유부단하기까지 했다. 러시아를 맹비난하면서도 처음부터 군사적 개입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길을 터준 꼴이 됐다.
이런 터라 미국이 분쟁을 부추겼다는 음모론도 나온다. 유럽 내 러시아의 위협을 키워 트럼프 때 잃어버린 나토에 대한 장악력을 되찾으려 한다는 거다. 또 러시아와 나토 회원국 간 교류를 끊으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써온 유럽 나라들은 값비싼 미국산을 써야 한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건 용서 받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러시아는 악마, 미국은 천사로만 여기는 건 국제사회의 현실을 망각하는 실수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국익에 도움이 되는 대응이다. 미국 압박이 심했는지, 정부는 일단 "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한다"는 원칙을 내놨다. 하지만 한국과 러시아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적대적이기는커녕 동맹 다음으로 우호적인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다. 1990년 수교 이후 2억 달러였던 무역은 지난해 273억 달러로 130배 이상 컸다. 코로나 전인 2019년에는 한해 70만명이 양국을 오갔다.
제재 동참 소식이 전해지자 곳곳에서 한숨이다. "이제 북방정책은 물 건너갔다"는 탄식이 나왔다. 러시아와 국교 수립 후 거의 모든 정권이 북방정책, 또는 비슷한 이름으로 양국 간 협력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제재가 시작되면 연해주 개발, 남북 유라시아 철도 건설 등은 무산될 게 뻔하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러시아 카드도 무용지물이 된다. 중국처럼 러시아도 미국 견제 수단으로 북한을 활용할 거다. 러시아 수출 길이 막히면 물론 국내 기업들의 고통은 심해진다. 지난해 양국 간 무역 규모는 273억여 달러로 러시아는 10대 교역국이다. 수출액은 99억여 달러로 전체의 1.6%를 차지한다. 이 중 40%가 자동차 및 부품으로 국내 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게 뻔하다. 반면 미국의 경우 러시아는 26번째 교역국으로 수출 비율이 전체의 0.35%에 불과하다. 워싱턴 주도로 경제 제재가 단행되면 미국 피해는 거의 없는 반면 한국은 적잖은 손해를 본다는 얘기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합병했던 2014년 당시 박근혜 정부가 경제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 정부가 동참키로 한 건 한미동맹의 무게를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간 한국은 강대국 간 충돌로 큰 손해를 입고도 제대로 보상 못 받는 과오를 되풀이해 왔다. 사드 배치가 대표적 사례로 직접적인 수혜자는 주한미군임에도 피해는 한국 기업들이 봤다. 그런데도 미국이 나서 한한령(限韓令) 완화를 중국에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2018년부터 시작된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로 한국 기업이 큰 손해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러시아 경제 제재 동참으로 빚어지는 피해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보상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한미동맹도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순 없다. 늘 한쪽만 희생하는 동맹이라면 금이 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