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년중앙]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이름 없는 영웅들을 만나다

중앙일보

입력

3·1운동 3대 실력항쟁지 안성
학생·농민·상인…평범한 이들이 힘 합쳤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통해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삼일절. ‘3·1운동’ 하면 민족대표 33인 혹은 유관순 열사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죠. 하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인 수많은 ‘이름 없는 순국열사’들이 있어요. 바로 민중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만세운동을 펼치며 전국 곳곳에서 태극기를 흔들었죠. 그중에서도 경기도 안성은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함께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불리며 3·1운동 당시 최대 규모의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에요. 특히 농민들이 주축이 돼 독립을 외쳤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죠.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에 대해 배워보고, 3·1운동의 의의도 다시 한번 되새겨보기 위해 안성 3·1운동기념관을 찾았습니다.

1919년 3월 1일의 모습을 재현해본 소중 학생기자단.

1919년 3월 1일의 모습을 재현해본 소중 학생기자단.

안성 3·1운동기념관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안성 지역의 순국선열·애국지사를 추모하고, 독립운동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에요. 김민아·윤시현 학생기자, 이한나 학생모델이 태극기가 일렬로 늘어선 기념관 문턱을 넘었죠. 김원옥 문화관광해설사가 소년중앙 학생기자단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안성은 그 어느 곳보다 뜨겁게 만세시위를 열었던 곳이에요. 그래서 어느 지역보다도 혹독한 시련을 겪었죠. 3·1운동이 치열하게 진행됐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김원옥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안성 3·1운동기념관 내부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김원옥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안성 3·1운동기념관 내부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자 우선 3·1운동의 시작을 되짚어볼 수 있는 공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어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는 점점 높아지는 중이었어요. 이어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하자 일본제국의 고종 독살설이 퍼졌고, 분노한 백성들이 집결하기 시작했죠. 같은 해 2월 8일 일본의 한국 유학생 대표들은 도쿄에 있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를 2·8독립선언이라 해요. 조선청년독립단이 발표한 독립선언서·결의문은 3·1운동의 발단이 됐죠. 그리고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담은 독립선언서가 발표돼요.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고 독립국으로서의 조선을 선언한 글인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가졌다. 독립기념관 소장 복제품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고 독립국으로서의 조선을 선언한 글인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가졌다. 독립기념관 소장 복제품

독립선언서는 손병희·한용운 등 민족대표 33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로, 3·1운동의 결정적 구실을 하게 된 글이에요. 서울 종로 보성사에서 인쇄돼 2월 28일부터 전국에 전달·배포됐죠. 1762자에 달하는 선언서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평화적 방법으로 자주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교과서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가 바로 독립선언서 속 한 구절이죠. 독립 선언이 이뤄지자 탑골공원에 집결한 수천 명의 민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3·1운동은 점점 전국으로 확산했어요.

만세운동 당시 안성군 관내 지도. 최초의 만세운동이 이뤄진 양성공립보통학교, 4월 1일 불탄 옛 양성주재소 터 등이 표기됐다.

만세운동 당시 안성군 관내 지도. 최초의 만세운동이 이뤄진 양성공립보통학교, 4월 1일 불탄 옛 양성주재소 터 등이 표기됐다.

안성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이는 바로 독립운동가 최은식 선생입니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를 참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던 최은식 선생은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안성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심하죠. 이후 안성 곳곳에서 약 한 달간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집니다. 안성에서 일어난 최초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1일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남진우, 선립상업학교를 다니던 고원근이 주도한 학생 만세운동이에요. 같은 날 안성장터의 상인들도 만세시위에 합류했죠. 3월 28일부터는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고, 3월 30일 안성시장에서 약 1000여 명의 시위대가 태극기를 흔들며 거센 만세운동을 펼쳤어요. 3월 31일 3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운동에는 여성들도 합류해 군청·경찰서·면사무소 등을 돌며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그리고 대망의 4월 1일 저녁, 최은식·홍창섭·이유석·이덕순·이근수·이희룡 등이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주도합니다. 면사무소에 모인 100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어요. 이들은 일제의 통치 기관이 있던 양성면 동항리로 향했고, 동료 운동가들과 성은고개(현 만세고개)에서 연설을 이어가며 독립 의지를 다졌죠. 양성면 인근에서는 양성면 주민 1000여 명과 합세해 무려 2000여 명의 연합시위대를 형성했어요. 태극기를 휘날리며 당시 일제의 상징이었던 주재소·우편소 등 건물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도 파괴했죠. 4월 1~2일 이틀에 걸쳐 일제 통치기관을 부수는 등 이른바 ‘2일간의 해방’이라고 불리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어요. 일련의 만세운동을 통해 안성은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더불어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꼽히죠.

일본강점기 고문방을 재현한 공간에 들어간 세 사람. 감옥 내 고문실에서는 독립운동가에게 구타·전기고문·물고문 등 야만적인 행위가 가해졌다.

일본강점기 고문방을 재현한 공간에 들어간 세 사람. 감옥 내 고문실에서는 독립운동가에게 구타·전기고문·물고문 등 야만적인 행위가 가해졌다.

짧은 2일간의 해방 후,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본군에게 검거됩니다. 이들은 살인·방화·고문·투옥 등 일제의 잔혹한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재판장에 섰죠. 5월 4일 안성 경찰에서 조선총독부 검사의 신문을 받게 된 최은식 선생은 “나는 전부터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다”며 그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결국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김 해설사는 “현장·옥중·부상 순국자가 26명에 달하는가 하면, 41명이 태형을, 177명이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받았어요. 또 1인당 최고 409엔에 달하는 손해배상금을 부담시켰는데,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800만원가량의 큰돈이죠.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대부분 소작농이었기 때문에 재산상의 손해도 엄청났어요”라고 설명했어요.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은 다시 한번 독립의 의지를 불태웁니다. 안성의 청년층은 민족의 실력양성·단결을 목표로 한 교육, 신문화 전파 등에 관심이 높았어요. 1920년 4월 1일 결성된 안성청년야학회(安城靑年夜學會)는 아동·청년을 대상으로 교육에 힘썼죠. 또, 서울의 청년회와 연계해 농민운동·노동운동 등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주민규(맨 왼쪽) 전시운영 담당 선생님과 안성 3·1운동기념관 야외 공간을 탐방하는 학생기자단. 광복사·무궁화 동산 등을 방문할 수 있다.

주민규(맨 왼쪽) 전시운영 담당 선생님과 안성 3·1운동기념관 야외 공간을 탐방하는 학생기자단. 광복사·무궁화 동산 등을 방문할 수 있다.

전국으로 확산한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임시정부와 연계해 무장투쟁을 이끌어가는 비밀결사·항일단체가 탄생했죠. 안성에서도 의열투쟁을 위해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는데요. 죽산면 장계리 출신의 김태원은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합니다. 이후 국내로 잠입해 대한독립단·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1920년 일제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죠. 금광면 개산리 출신의 유만수는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고, 1945년 7월 24일 아시아 각국의 친일파들이 모인 아시아민족분격대회 장소에 폭탄 2개를 설치해 폭발시켰어요.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전국 각지에서 운동가가 모여들었어요. 안성 지역 출신 인물로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임명돼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복무한 심광식,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한 홍종윤,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한 박건배 등이 있어요.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이뤄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축하하기 위한 날, 바로 광복절이죠. 약 300명의 안성 3·1운동 선열 명단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전시관 관람을 마친 학생기자단은 안성 3·1운동기념관 홍창화 학예연구원에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어요.

왼쪽부터 윤시현(서울 서일초 6)·김민아(경기도 소하초 5) 학생기자·이한나(경기도 수내초 6) 학생모델이 태극기를 들고 안성 3·1운동기념관 입구에 섰다.

왼쪽부터 윤시현(서울 서일초 6)·김민아(경기도 소하초 5) 학생기자·이한나(경기도 수내초 6) 학생모델이 태극기를 들고 안성 3·1운동기념관 입구에 섰다.

시현: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이 제일 크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안성에 기념관이 세워진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성은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즉 지금의 양성초등학교에서 처음 만세시위가 전개된 이후로 원곡면, 읍내, 죽산면, 일죽면 할 것 없이 곳곳에서 큰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여기 기념관이 세워진 곳도 만세고개라는 명칭으로 불리죠.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3대 실력항쟁지이기도 하고, 주민의 힘으로 실질적인 해방을 이루어낸 의미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기념관이 세워졌어요.  
시현: 3.1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혁명은 힘없고 약한 시민들에게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이 원하는 권리를 유지·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겁니다. 물론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안재홍 선생 같은 분들은 정치의 일선에서 나라를 변혁하려고 노력하셨죠. 학교에서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한다든지, 대대로 경작하던 땅을 하루아침에 잃는 부조리한 상황을 마주한 학생과 일반 민중은 참지 않았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재를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일제는 폐단됐던 태형령을 1912년 3월 다시 제정했다.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과 수많은 애국지사가 무자비한 태형에 처했다.

일제는 폐단됐던 태형령을 1912년 3월 다시 제정했다.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과 수많은 애국지사가 무자비한 태형에 처했다.

한나: 3·1운동이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3·1운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각자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 같은 경우는 그 시절 우리가 지나온 발자국을 통해서 용기를 얻어요.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용기부터,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독립을 포기하지 않은 용기 같은 것들이요. 눈앞의 총칼이 두려워서 시키는 대로 살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이름도 나라도 잃고 살아가고 있었겠죠. 과거 그분들이 힘든 상황을 딛고 일어난 모습에서 용기를 얻어 오늘날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무섭고 겁나는 일들이 수없이 많이 생기겠지만, 내 안에도 그런 용기가 있다는 믿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를 변화하고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민아: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예전에는 어떻게 사람을 모아 단결력 있는 만세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나요.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농업에 종사하고 오랜 세월 동안 마을 공동체를 이뤄 살았어요. 요즘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지만, 당시는 훨씬 끈끈한 사이였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알려지자 다 같은 마음으로 단결할 수 있었고, 한 마을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나면 옆 마을로 옮겨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더군다나 옆집의 아무개가 만세를 부르다가 어디에 잡혀갔다고 하면 가족 같은 마음으로 더욱 분노해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겠죠.
벽관은 사람이 들어가 겨우 서 있을 정도의 크기로 홈을 파 만든 관으로, 독립운동가를 가두는 투옥실이자 고문 도구였다.

벽관은 사람이 들어가 겨우 서 있을 정도의 크기로 홈을 파 만든 관으로, 독립운동가를 가두는 투옥실이자 고문 도구였다.

민아: 3·1운동 당시 태극기 만드는 방법이 전국에 전파된 경위도 궁금해요.
만세운동을 했을 때는 태극기의 규격·모양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았어요. 독립신문과 같은 매체에서도 발행될 때마다 태극기 모양이 다르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인쇄물에 그려진 모습을 보거나 동네마다 전해진 태극기를 알음알음 따라 그렸죠. 그래서 과거의 태극기를 보면 제각기 모양이 다 달라요. 태극의 모양이 옆으로 돌아가 있거나, 네 모서리에 건곤감리 대신 한자로 ‘대한독립’을 적기도 했죠. 지금은 태극기에 글씨를 적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이지만, 당시에는 흰색 배경에 각자 독립의 의지를 담은 글을 적기도 했어요. 비록 모양은 달라도 독립을 열망하는 마음만은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시현: 영화 ‘말모이’를 인상 깊게 봤는데, 영화 주인공들처럼 유명한 독립운동가분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운동가가 정말 많았을 것 같아요. 이런 분들은 어떻게 조사하고 찾아내는지 궁금해요.  
유관순 열사는 들어봤어도 오늘 안성 3·1운동기념관에 오기 전까지 남진우·고원근·최은식 선생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거예요. 이렇듯 우리 사회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억해야 할 선열들이 정말 많은데요.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당시 자료인 일제 감시대상 카드를 보면 이름과 사진이 나와 있어요. 그런 자료를 토대로 판결문·심문조서·신문 같은 자료에서 이름·활동 내역을 찾아보죠. 후손과 직접 연락해 선열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등록문화제 제385호인 태극기 목판은 3·1운동 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해 목재에 4괘와 태극문양을 새겨 만들었다. 독립기념관 소장 복제품

등록문화제 제385호인 태극기 목판은 3·1운동 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해 목재에 4괘와 태극문양을 새겨 만들었다. 독립기념관 소장 복제품

민아: 안성 독립운동가 포상 현황에 포상자 242명, 미포상자 74명으로 돼 있던데, 미포상자가 74명이나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포상은 기념관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보훈처에서 엄격한 기준과 심사를 거쳐 실시합니다. 따라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많지 않거나 찾기 어려울 경우 안타깝지만, 포상이 이뤄지긴 힘들 수 있죠. 우리 기념관에서는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꾸준히 수집·연구하고 있어요. 또, 독립에 힘쓰신 선열의 후손이 증언하거나 관련 자료를 제보해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답니다.  
한나: 기증 물품도 꽤 많던데, 기념관에 어떤 물건들을 기증할 수 있나요.
현재 기념관에서는 기증 캠페인 ‘드림’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안성의 3·1운동과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는 물론, 근현대를 거치며 남은 사진과 기록들을 받고 있죠. 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가 일상에서 사용한 물건이나 훈장, 후손에 말씀으로 전해온 구술사 자료 등 안성의 독립운동사를 뒷받침할 자료가 있다면 꼭 찾아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만세고개(구 성은고개)는 원곡면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1991년 만세고개로 개칭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만세고개(구 성은고개)는 원곡면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1991년 만세고개로 개칭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한나: 저희 같은 학생들이 기념관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있나요.
기념관에서는 매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해요. 크게 도슨트·행사 진행·환경정리로 나뉘는데요, 도슨트는 관람객들에게 전시를 설명하고 관람 안내를 도와요. 유물·자료를 통해 우리 역사를 설명하다 보면 역사가나 큐레이터의 꿈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르죠. 또 3·1절이나 광복절 등 행사에서 체험을 보조하면서 행사의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고요. 기념관과 주변 환경을 정돈하고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도 있습니다.
시현: 발렌타인데이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기도 한데요. 다들 초콜릿 주고받기에만 여념이 없고, 독립운동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슬펐어요.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할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가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마련된 기념일은 3·1절, 현충일, 광복절, 순국선열의 날 등 참 많죠. 이런 날을 단순히 쉬는 날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날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분들이 나라를 위해 힘쓰셨는지 알아보고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 보세요. 저는 반대로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은데요. 반드시 우리가 어떤 날을 정해놓고 기념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고 추모하기 위해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달고 다니는 것처럼, 일상에서 독립운동을 기억하고 관심을 갖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념관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참여해볼 수도 있고, 유튜브에서 독립운동 관련 방송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비록 시작은 사소한 관심일지라도 쌓이고 쌓이면 우리 역사를 기억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마음이 샘솟을 거예요. 

과거에서 온 소년중앙 학생기자단의 편지

2001년 안성 3·1운동기념관 내 부지에 세워진 안성 3·1운동 기념탑. 태극과 4괘로 구성됐으며, 3·1운동의 가치와 역사적 항쟁사를 표현했다.

2001년 안성 3·1운동기념관 내 부지에 세워진 안성 3·1운동 기념탑. 태극과 4괘로 구성됐으며, 3·1운동의 가치와 역사적 항쟁사를 표현했다.

후손들아,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니? 나는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어. 하지만 평화로운 일상도 잠시, 일본제국은 식민통치를 통해 우리나라를 지배했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에 참여했지. 하지만 일제는 우리가 자유를 찾으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동네 주민들을 잡아 가두고 무자비하게 고문했어. 가족·친구·선생님 등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소중한 생명을 잃어갔지. 그래도 우리는 굴하지 않았단다. 일제의 총과 칼에 맞서 만세운동을 이어나갔고, 주재소·우편소 등 우리 것을 빼앗아 장사하던 일본 사람들을 내쫓았어. 무엇보다 진정한 의미의 독립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지.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항상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키워갔단다. 나를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가는 각자 맡은 역할을 일상 속에서 충실히 이행했어. 무력에 직접 대항하기도 하고, 신문·소설·시 등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하고, 만세운동을 주최하고 이끌었지. 우리들의 열정과 죽음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탄생한 거야.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자유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가치란 사실, 절대 잊지 않길 바란다.  김민아(경기도 소하초 5) 학생기자

나의 후손들에게. 나는 오늘 내 고향 안성의 친구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러 나간단다. 결국에는 일본 헌병들에게 잡힐 것도, 내 이름이 사라질 것도, 내가 가족을 버리고 먼저 떠날 것도 다 머릿속에 그려지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만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고 만세운동에 함께하기로 했어. 우리는 그냥 학생이고, 농사꾼이고, 아이들의 아빠이고 엄마야. 양반들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돈이 많지도 않지. 하지만 사랑하는 후손 여러분. 들판의 풀은 바람에 쓰러지고 추위에 시들었다가도 때가 되면 다시 피어나 온 세상을 초록색으로 뒤덮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아무리 무자비하게 밟아도 꿋꿋이 그 생명을 이어가지. 잡초 같은 우리는 절대 멈추지 않을 거야. 우리가 짧은 시간이지만 이루어 낸 2일간의 해방이 온 나라에 영원히 이어지기만을 소망할 뿐이야.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도 좋아. 그저 여러분이 우리말을 쓰고 우리 문화를 누리며 독립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싸웠던, 용기 있는 사람 중 하나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어. 우리가 목숨을 걸고 우리나라를 사랑한 만큼 여러분도 나라의 소중함을 알고 사랑해주길 바라. 우리나라를 강하고 멋있는 나라로 만들어 줘. 우리나라는 그만큼 가치가 있는 훌륭한 나라야!  윤시현(서울 서일초 6) 학생기자

소중 학생기자단이 경기도 안성 출신의 조병화 시인이 쓴 ‘이 만세 소리’ 시비(詩碑)를 살펴보고 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경기도 안성 출신의 조병화 시인이 쓴 ‘이 만세 소리’ 시비(詩碑)를 살펴보고 있다.

나의 후손들 보거라.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에 봄이 왔음을 체감하는 3월이 코앞이야. 3월에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공휴일이 있어. 바로 3월 1일 삼일절이지. 내게는 정말 두려우면서도 행복한 날이었어.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거든. 전국 곳곳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했어. 일제의 군화에 짓밟히고, 감옥에 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만세를 외쳤지.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지? 어린 나이에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에 18세의 나이로 순국했지. 유관순 열사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많은 분이 만세운동을 벌이던 중 돌아가셨어. 총을 쏘고 태형을 내리는 일제 앞에서 나는 너무 무서웠어.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고, 불타는 우리의 민족정신 끝에 우리나라를 다시 찾았지. 매년 삼일절, 학교·학원이 쉰다고 마냥 놀지만 말고 근처의 3·1운동기념관, 서대문형무소 등 역사를 품은 장소를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특별한 준비물이 필요한 건 아냐. 한 번씩 둘러보고 당시의 상황을 느껴봐. 그럼 우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을 거야. 그저 우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물론 삼일절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에게 작은 관심을 가져준다면 더욱 좋겠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여러분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길 바라. 타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은 잠시 접어두고, 개인과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길 바라.  이한나(경기도 수내초 6) 학생모델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