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을 전쟁터 둘 수 없다" 5살 손잡고 걸었다, 48시간 탈출 [르포]

중앙일보

입력 2022.02.28 05:00

업데이트 2022.03.0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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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6시간의 비행, 그리고 5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려 도착한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은 2022년 세계사의 축소판이었다. “제국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러시아의 야욕, “관여는 하되 참전은 하지 않는다”는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연합의 답답함, “다음은 우리 차례가 될 수도 있다”는 폴란드의 긴장감, “다시 러시아의 속국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우크라이나의 결기와 그 뒷편의 무기력감이 혼재된 역사의 현장이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우크라-폴란드 접경을 가다

일요일인 27일 아침 7시(한국시간 27일 오후 3시)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에 접한 메디카 국경검문소.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이 접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서 폴란드 난민 집결소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미소를 보이며 기자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우크라이나 소년 이고르(5). 김현기 특파원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이 접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서 폴란드 난민 집결소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 미소를 보이며 기자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우크라이나 소년 이고르(5). 김현기 특파원

"폴란드 프셰미실 테스코의 난민 집결소로 떠나실 분들 버스에 타세요."

엄마 손을 꼭 붙잡은 채 불안감에 떨던 이고르(5)의 표정이 그제서야 풀렸다. 20시간 넘게 밤새도록 걸어 국경에 도착한 이고르의 코는 추위에 빨개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전쟁터로 변한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이고르는 창 밖의 기자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기자도 같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침 검문소 인근 성당에선 정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국경에서 차로 20분 가량 떨어진 프셰미실 중앙역이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김현기 특파원

국경에서 차로 20분 가량 떨어진 프셰미실 중앙역이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김현기 특파원

메디카 국경검문소 주변에는 장시간 걸어서 국경을 넘어온 우크라이나인들을 위해 커피·스프 등 따뜻한 음료가 배식되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구급차도 다수 대기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어수선했지만 구호단체들의 마음은 넉넉했다. 피난민들의 사연들은 다양했다.

노란 담요를 허리에 두르고 등산화를 신은 루스라나(22)는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제 가족은 7명인데, 총동원령(18~60세 남성의 출국 금지) 때문에 결국 나 혼자 나오고 말았어요.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니…." 우크라이나 서부 중심도시 리비우에서 20시간을 걸어 국경까지 왔다는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리 가족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며 가족을 연신 걱정했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 우크라이나 소년이 불안에 떨고 있다. 이곳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출발해 밤새 스무시간 이상 걸어서 도착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김현기 특파원

엄마 품에 안긴 어린 우크라이나 소년이 불안에 떨고 있다. 이곳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출발해 밤새 스무시간 이상 걸어서 도착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김현기 특파원

40대의 이리나는 모친(72), 딸 둘(10살과 5살)과 함께 국경에서 180㎞ 떨어진 테레스폴에서 48시간 만에 도착했다. 택시를 탔지만 길이 너무 막혀 중간부터 걸었다고 한다. 짐이 무거워 중간에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딸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터에서 대피시켜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이리나 가족처럼 이날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동생 둘을 데리고 24시간 걸어 국경에 도착한 카티나(26)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자 주저없이 "푸틴, Fxxx You!"라 욕설을 외쳤다. 같은 질문에 대부분이 비슷한 답을 했다.

우크라이나를 빠져나온 이들이 전하는 우크라이나 남성들의 사기(士氣)는 대단했다.

리비우에서 택시를 타고 폴란드 국경으로 대피한 일본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택시기사는 '난 코사크(우크라이나 일대인 드레프르강 등 흑해 연안 일대에 거주하던 기마민족으로 무사 기질이 강함)의 자손이다. 동부에서도 의용병으로 싸워왔다. 이제부터 러시아 친구들에게 복수하러 간다'며 리비우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이 접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 몰려온 우크라이나 사람들. 김현기 특파원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이 접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 몰려온 우크라이나 사람들. 김현기 특파원

국경에서 차로 20분 가량 떨어진 프셰미실 중앙역. 열차편으로 피난한 이들, 역 임시 대피소에 자리잡은 이들, 자원봉사요원들로 실내는 북적였다. 당초 매일 3편이던 우크라이나발 폴란드 도착편은 승객이 쇄도하며 마비상태에 빠져 이날 단 한 편 운행에 그쳤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서 오는 피난민을 위해 무료로 식료품과 담요를 제공하고 대합실에는 간이침대까지 마련했다. 어린이를 위한 곰인형도 준비했다. 종이에 이름 등을 적어 등록하면 시에서 숙박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돕는다. 이미 2000명 가량이 등록했다.

국경 인근 검문소 8곳에는 안내소를 만들고, 입국 시 필수적이던 코로나 음성확인서도 생략했다. 당장 갈 곳이 없는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전면 지원이다. 당국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0만 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난민이 인근 폴란드로 넘어왔다. 지난해 가을 벨라루스 난민들이 국경을 넘으려 할 때 철조망까지 치고 차갑게 되돌려 보냈던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이 접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 몰려온 우크라이나 사람들. 김현기 특파원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이 접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 몰려온 우크라이나 사람들. 김현기 특파원

이유는 간단했다. 역사적으로 한 식구였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일체감과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이다. 역에서 180km 떨어진 프라코프 자택에서 차를 몰고 온 컴퓨터공학 과학자 카밀(24)은 "이제 러시아 세력 바로 옆에 폴란드가 놓일 수 있다는 위기감에 어떻게든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자원봉사에 나섰다"며 "러시아에 해주고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너는 질 것(You will lose)이란 한마디"라고 말했다.

남종석 폴란드한인연합회장은 "폴란드와 러시아는 서로 보드카 원조국이라 우길 정도로 마치 한국과 일본과 같이 사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는 바꿔 말하면 초강대국 러시아에 대한 위협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기자가 27일 새벽 2시쯤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약 80㎞ 떨어진 폴란드 남동부의 소도시 제슈프의 고속도로상 주유소를 찾았을 때 주유까지 무려 70분이 걸렸다. 새벽 2시에 주유 소요시간 70분은 러시아가 벌이는 이 전쟁이 얼마나 확산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의 발로다.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이 접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 몰려온 우크라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김현기 순회특파원이 잠시 포즈를 취했다.

우크라이나 서쪽과 폴란드 동남쪽 국경이 접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 몰려온 우크라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김현기 순회특파원이 잠시 포즈를 취했다.

일각에선 우크라이나와 543㎞가량 국경이 맞닿아 있는 국가이자 유럽연합(EU) 회원국인 폴란드가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안보·경제 측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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