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공 아니다” 러 제재에 반대…‘중재 외교’ 中의 속셈 드러났다

중앙일보

입력 2022.02.28 05:00

업데이트 2022.02.28 09:08

지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만이 작성한 ‘소련 홍군 제3차 세계대전 전략 지도’. [대만 국사관]

지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만이 작성한 ‘소련 홍군 제3차 세계대전 전략 지도’. [대만 국사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이 유럽에 발이 묶이면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유리해졌다는 주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핵심 브레인’으로부터 제기됐다. 러시아 제재를 반대하면서 ‘중재 외교’를 내세우는 중국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발언이다.

정융녠 “지정학 저울 중국 쪽 기울어”
감정적 충동 자제해야 전략 착오 피해
시진핑·왕이 ‘중재 외교’로 전면 나서
베이징 우크라 대사관 공안 철통 감시

정융녠 교수는 1997년부터 재직했던 싱가포르국립대학 동아연구소를 23년 만인 2020년 떠났다. [중국 바이두 캡처]

정융녠 교수는 1997년부터 재직했던 싱가포르국립대학 동아연구소를 23년 만인 2020년 떠났다. [중국 바이두 캡처]

정융녠(鄭永年·60) 홍콩중문대 글로벌 및 당대 중국 고등연구원 원장은 26일 중국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질서 재건’이란 글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유럽의 지정학 다툼은 미국을 유럽으로부터 인도·태평양으로 전환하는 힘의 발걸음을 늦출 것”이라며 “중국이 치명적인 전략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중국의 현대화 여정은 저지당하지 않고, 중국이 새로운 국제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을 능력과 의지를 갖게 됐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에 미국과 러시아의 발목이 묶인 동안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세력을 확대할 시간을 벌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1950년 소련 스탈린이 한국 전쟁으로 미국과 중국의 발목을 한반도에 묶어 놓은 채, 동유럽에서 자신의 세력을 넓혔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지난 20일 베이징 국가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 겨울 올림픽 폐막식에서 “천하일가(天下一家), ONE FAMILY”를 표시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 20일 베이징 국가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 겨울 올림픽 폐막식에서 “천하일가(天下一家), ONE FAMILY”를 표시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정 원장은 “지정학의 천칭(저울)은 다시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국제 정세는 변화무쌍해 중국은 냉정하게 대국간 상호 움직임의 새로운 변화, 새로운 추세를 분석하고 더욱 이성적이어야 한다”며 “조금이라도 감정이 섞여선 안 되며 감정적 충동은 치명적인 전략 착오를 가져온다”고 경고했다. 정 원장은 “대국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구질서에 도전하는 것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라며 “국제 평화를 추진하고 유지하는 책임과 능력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정 원장의 ‘전략적 기회론’은 실제 중국 외교에도 반영되고 있다. 지난 25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갖고 우크라이나와의 협상을 테이블에 올리는 ‘중재 외교’를 펼쳤다.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도 이날 유럽연합(EU) 외교 대표, 영국 외교장관, 프랑스 대통령 외교 보좌관과 연쇄 통화를 갖고 “중국은 세계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해 건설적 역할을 발휘하겠다”고 밝혔다. 어느 한쪽 편을 들기보다 글로벌 외교에서 중국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듯한 발언이다.

왕 국무위원은 26일에는 EU와 러시아의 가교 역할을 맡아온 독일 외무장관과 통화했다. 왕이는 통화에서 “중국은 계속해서 평화 모색, 평화 실현을 위해 건설적 역할을 발휘하겠다”고 말했다고 중국 외교부가 27일 발표했다. 평화를 중재하겠다곤 하지만 중국은 여태껏 러시아의 군사 행동을 ‘침공’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떠한 러시아 ‘제재’도 반대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4일 베이징 국가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 겨울 올림픽 개막식장에서 엄지를 치켜 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4일 베이징 국가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 겨울 올림픽 개막식장에서 엄지를 치켜 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정융녠 원장은 ‘나라의 스승(國師)’으로 불리는 시 주석의 핵심 브레인이다. 지난 2020년 8월 시 주석이 주재한 ‘경제사회영역 전문가·학자’ 좌담회에 참석한 9명의 학자 중 유일한 정치·외교 전문가였다.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로 오랫동안 싱가포르대 동아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다 지난 2020년 초 중국 선전(深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 원장의 글은 발표 즉시 중국 관찰자망, 중화권 친중 매체 둬웨이(多維)에 전제됐고, 중국 내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개인 SNS에 퍼 나르면서 빠르게 확산됐다.

유럽외교관계이사회(ECFR)의 프랑수아 고드망 박사가 자신의 트위터에 중국 역사학자 쑨장(孫江·난징대), 왕리신(王立新·베이징대), 쉬궈치(徐國琦·홍콩대), 중웨이민(仲偉民·칭화대), 천옌(陳雁·푸단대) 교수 5명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알렸다. [트위터 캡처]

유럽외교관계이사회(ECFR)의 프랑수아 고드망 박사가 자신의 트위터에 중국 역사학자 쑨장(孫江·난징대), 왕리신(王立新·베이징대), 쉬궈치(徐國琦·홍콩대), 중웨이민(仲偉民·칭화대), 천옌(陳雁·푸단대) 교수 5명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알렸다. [트위터 캡처]

역사학자 5인 “불의의 전쟁 반대”

소수이지만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반전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26일 중국의 역사학자인 쑨장(孫江·난징대), 왕리신(王立新·베이징대), 쉬궈치(徐國琦·홍콩대), 중웨이민(仲偉民·칭화대), 천옌(陳雁·푸단대) 교수 다섯 명이 연명으로 “불의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유럽외교관계이사회(ECFR)의 프랑수아 고드망 박사가 자신의 트위터에서 공개했다. 다섯 교수는 성명에서 “유엔 상임이사국, 핵무기를 보유한 대국이 결국 약소한 형제 나라를 공격하면서 국제 사회가 놀라고 있다”며 “러시아에 천 가지 이유가 있고 온갖 구실이 있더라도 무력으로 주권 국가를 침입한 것은 유엔 헌장을 기초로 하는 국제 관계의 준칙을 유린했고, 현존 국제 안보 체계를 파괴한 것”이라고 규탄했다.

성명은 “러시아 정부와 푸틴 대통령은 전쟁을 중단할 것을 강력히 호소한다”며 “강권은 문명 진보의 성과와 국제 정의의 원칙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족에 거대한 치욕과 재난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비난했다. 규탄 성명은 중국 웨이신(微信·중국판 카카오 페이지)의 ‘강문직언(江門直言)’ 계정을 통해 발표됐으나 두 시간 만에 삭제됐고, 해당 계정도 27일 오전 현재 폐쇄됐다.

중국 선전 당국의 공정한 보도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중국 외교·안보 분야의 한 소장파 학자는 최근 SNS에 “선전기구 종사자는 러시아 인민의 공복(고위관리, 정부대변인, 정부매체)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것 외에도 러시아 대중을 취재하라”며 “러시아 주인이 그들의 공복이 발동한 이번 전쟁을 동의하는지 하지 않는지 관심을 갖기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러시아 국민의 반전 여론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반전론은 정융녠 원장이 내세운 ‘전략적 기회론’과 선전부의 검열에 묻히고 있다. 26일 찾아간 베이징 싼리툰(三里屯) 외교단지의 우크라이나 대사관 부근에는 정복과 사복 차림의 경찰과 공안 차량이 행인을 감시하며 혹시 있을 불상사를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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