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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세계대전 대신 택한 美의 초강수…'금융 핵폭탄' 눌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재한 러시아인들 등 참석자들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손 피켓을 들고 있다. 뉴스1

재한 러시아인들 등 참석자들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손 피켓을 들고 있다. 뉴스1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가 결국 러시아를 향한 '금융 핵폭탄'의 버튼을 눌렀다. 26일(현지시간)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하면서다.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직접 군사적 개입을 배제한 상황에서 러시아 경제의 목줄을 죄며 '금융 고립'에 빠뜨리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유튜버인 브라이언 타일러 코헨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제재는 역사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고 정치·경제를 아우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러시아를 물리적으로 공격해 제3차 세계대전을 시작하는 것과 국제법을 위반한 나라(러시아)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SWIFT는 1973년 금융회사 간 금융 거래와 결제 업무를 위해 만든 글로벌 메시지 시스템이다. '누가 누구에게 어디 은행으로 돈을 보내겠다'는 것을 코드(SWIFT 코드)화한 것이다. 일종의 '지급 지시서'다. 전 세계 200여 개국 금융기관 1만1644개가 SWIFT로 돈을 지불하거나 무역대금을 결제하고 있다. 지난해 SWIFT 시스템을 통한 하루 평균 거래만 4200만 건에 이른다.

전 세계 금융 및 무역 거래의 신경망인 SWIFT 배제 조치가 이뤄지면 국제 금융망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 수출 대금을 받거나 수입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돼 사실상 국제 교역에서 배제된다. 해외 투자를 받기도 어려워지고, 돈을 빌리는 것도 쉽지 않다. 뉴욕과 런던 등에서 굴리는 외환보유액 접근도 제한된다. SWIFT 차단이 '금융의 핵폭탄'으로 불리는 이유다.

현재 SWIFT에서 차단된 나라는 이란과 북한뿐이다. 미국 등 서방이 그 목록에 러시아를 추가해 정상적인 국제금융거래를 완전히 끊겠다고 나선 건,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강력한 응징의 메시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군사 개입보다 금융 시장을 통한 압박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는 분석이다.

SWIFT란.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SWIFT란.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러시아의 목줄을 죄기 위한 수단으로 SWIFT 차단이란 초강수를 둔 건 이 카드가 약발을 발휘할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러시아 정부 수입에서 원유와 가스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5.8%에 달한다. SWIFT망 접근이 막히면 수출 대금을 받기 힘들어진다. 돈줄이 빠르게 말라갈 수 있다.

SWIFT 의존도도 높다. 러시아 SWIFT 협회에 따르면 러시아의 은행 300여 곳이 SWIFT에 가입해 있다. 러시아 전체 국제 금융거래의 80%를 SWIFT에 의존하고 있다. 또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SWIFT 결제 건수가 많은 국가다.

게다가 SWIFT 차단으로 이달 기준 6430억 달러(약 775조원)에 이르는 러시아 외환보유액의 발목까지 잡을 수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러시아가 외환보유액을 미 달러 등 국제 통화로 갖고 있다 보니 거래 자체가 제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환보유액은 달러나 주요국 국채 등을 보유하는 만큼 SWIFT에서 퇴출당하면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된다.

클레이 로워리 국제금융협회(IIF) 부회장은 "러시아의 SWIFT 퇴출과 중앙은행 제재안은 러시아 경제와 은행 체계에 커다란 피해를 줄 것"이라며 "사람들의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과 달러화 환전이 많아지면서 지급준비금(reserves)이 고갈될 수 있다"고 말했다. 루블화 가치 급락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실제로 2014년 9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며 'SWIFT 퇴출'이 거론됐던 당시 알렉세이 쿠드린 러시아 재무장관은 이 제재가 적용되면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이 1년 안에 5%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이 때문에 SWIFT 퇴출은 "전쟁 선포와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일 정도였다.

SWIFT 차단으로 인한 경제의 후폭풍은 이란의 상황으로 엿볼 수 있다. 핵 개발을 하던 이란은 2012년은 SWIFT에서 배제됐다. 당시 이란은 주요 수입원인 석유 수출 등이 막혀 결국 핵 개발을 포기했다. 마리아 샤기나 핀란드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는 "이란은 (SWIFT 차단으로) 석유 수출액의 절반과 외환 거래액의 30%를 잃었다"고 분석했다.

SWIFT 연간 이용규모 현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SWIFT 연간 이용규모 현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럼에도 서방이 그동안 러시아를 괴롭힐 수 있는 'SWIFT 탈퇴' 카드를 꺼내드는 데 망설인 것은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상대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지만, 아군도 상당한 손실과 충격을 감수할 수밖에 없어서다.

SWIFT 제재가 이뤄지면 서방 은행 등 금융회사는 러시아에 빌려준 자금을 제때 돌려받을 수 없게 된다. KOTRA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러시아의 외채 규모는 4906억 달러(약 591조원)에 이른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외국은행이 러시아 기업에 빌려준 대출액은 1210억 달러 수준이다.

그뿐만 아니다. SWIFT 결제망이 막히게 되면 러시아와 거래하는 기업들은 수출입 대금을 받기 어려워진다. 지난해 1~10월 기준 러시아의 대유럽연합(EU) 의존도는 35.8%에 이른다. 해당 무역 거래 자금이 묶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도 '안전 국가'는 아니다. 우선 러시아와 무역 거래를 하는 국내 기업도 수출입 대금 결제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최진형 KOTRA 모스크바무역관 차장은 "러시아 현지 수출·수입 관련 기업인들의 전화가 수십통 쏟아졌다"며 "SWIFT 제재로 거래가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체류하는 유학생과 기업 주재원도 송금받기 어려워진다. 익명을 원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현재 국내에서 SWIFT를 이용하지 않고선 해외 은행에 송금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거래하는 국내 기업은 향후 제재 수위와 강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익명을 원한 상사 업계 관계자는 “상황이 더 악화할 때를 대비해 대체 결제 등 다른 대안이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용석 무역협회 현장정책실장은 “중소기업의 경우 수출 대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경영이 상당히 어려워지는 만큼 중소기업의 타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SWIFT 사용 지역별 분포 현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SWIFT 사용 지역별 분포 현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러시아의 SWIFT 퇴출이라는 기본 방향은 결정됐지만, 아직 SWIFT 퇴출 은행 및 금융회사 명단과 시행 날짜는 발표되지 않았다. 미국 행정부 고위 관료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10여 개의 러시아 대규모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며 “이들 은행과 금융회사는 러시아 은행 부문 전체 자산의 80%가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SWIFT에서 제재를 받는 러시아 은행 명단이 나와야 그 영향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금융회사로 미칠 파급 효과는 크지 않을 전망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금융회사의 대(對)러시아 익스포저(위험노출액)는 14억7000만 달러(약 1조7706억원)로, 전 세계 대 러시아 익스포저의 0.4% 수준이다.

문제는 '금융 핵폭탄'에 피폭될 글로벌 원자재와 금융시장이다. 루블화 가치 하락과 국제 유가 상승 등은 세계 증시에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 25일 미국 등 주요국 증시 반등의 원인 중 하나가 미국의 러시아 제재 수위가 약했던 것"이라며 "이번 SWIFT 제재로 국제 유가가 뛰고 세계 증시가 하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급망 교란 등이 이어지며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은 더 커질 수 있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러시아에서 나오는 에너지나 곡물이 세계 시장에 제대로 공급이 안 되면 비용 상승에 따른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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