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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팬데믹을 겪으며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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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팬데믹은 사회변동과 권력이동, 경제·통상의 지각변동은 물론 문화예술과 가치관의 변화로 세상을 바꾸었다. 아테네 역병(장티푸스·발진티푸스로 추정)으로 20만~30만 명을 잃은 아테네는 스파르타가 이끈 펠로폰네소스 동맹에게 패했다. 스파르타에게 패한 반역죄로 추방되고, 역병에서 살아남은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기원전 431~404년)는 역사상 최초의 역병 기록이다.

로마제국은 안토니우스 역병(천연두·홍역, 165~180년)으로 인구의 25%를 잃었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가 전쟁터에서 역병으로 죽으면서 팍스 로마나는 막을 내린다. 이후 발생한 성키프리아누스 역병(천연두, 251~266년)과 유스티아누스 역병(페스트, 541~542년)은 로마제국의 멸망을 재촉했다. 결국 고대 유럽을 휩쓴 팬데믹으로 황제치하의 제국시대는 종식되고 지방영주가 군주로 부상하는 봉건시대가 열린다.

대역병으로 로마제국 쇠퇴
중세 페스트로 봉건시대 종식
세계대전과 팬데믹 이후 대공황
퍼펙트 스톰 극복 가능한가?

1300년대 소빙하기, 세계는 흉작·기근·대역병을 겪었다. 1346년부터 3년간 페스트 박테리아로 희생된 유럽인구는 30~60%였다. 이미 한계상황이던 소작농 제도는 인구급감으로 붕괴되고 지주들은 파산한다. 소농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소상공업 노동자가 된다. 공동생활로 수도사들이 몰살지경이 되면서 지식층 언어인 라틴어는 쇠퇴하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를 쓰는 국민국가(nation state)가 탄생한다. 이때부터 세제와 화폐제도, 금융 등 자본주의 경제·정치 시스템이 형성되고, 서유럽 국가들은 자원을 찾아 해외로 진출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상륙 이후 유럽인들은 의도치 않은 세균전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살시켰다. 1529년 스페인의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의 테노치티틀란을 함락시킨 것도 치명률 70~90%의 천연두였다. 153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168명 병사가 잉카제국의 8만 병력을 무찌른 것도 천연두 바이러스가 해치운 일이었다.

1803년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 루이지애나를 단돈 1500만 달러에 미국에 팔아넘겼다.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선에 채워 신대륙으로 실어 나를 때 묻어간 황열병 바이러스가 아이티의 종신총독을 자처한 나폴레옹의 병력 5만 명 중 4만7000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황열병 으로 인해 미국 영토는 두 배가 되고 서부 개척시대가 열린다.

1918년 독감 팬데믹은 1년 반 사이에 세계 인구 18억~19억 명 중 5억 명을 감염시켜 5000만~1억 명을 희생시켰다. 캔자스주 헤스켈 카운티 병영에서 발생한 독감 바이러스는 1918년 미국의 본격 파병으로 유럽으로 넘어갔다. 이미 1917년 유럽에서 독감이 돌았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제1차 세계대전(1914~19년)의 참호전과 병사들의 귀환으로 독감은 최단기간에 최대 인명 피해를 낸 팬데믹이 됐다.

최초의 세계대전과 팬데믹이 휩쓸고 간 1920년대의 세계는 어땠을까. 미국은 1920년 대선에서 ‘정상으로의 복귀’를 내건 워런 하딩(1921~23년 재임)을 뽑았다. 하딩 정권은 감세 정책을 시행했다. 1923년 경기는 반짝 살아나는 듯했다. 때마침 2차 산업혁명 후반기의 신기술로 전기, 자동차, 철강 산업 등이 성장을 견인했다. 라디오와 TV는 전국을 연결하며 주식을 사라고 홍보했다.

하딩의 급서(急逝)로 대통령이 된 캘빈 쿨리지(1923~29년 재임)도 자유시장 경제 정책을 고수한다. 주식시장은 주가의 10분의 1만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신용거래제도로 빚내서 투자하는 투기판이 된다. 주식투자 때문에 글을 배울 정도였다. 1928년 말 돌연 세계 실물경기 지표는 급락한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월스트리트 증시의 폭락을 신호탄으로 미국발 대공황은 전 세계로 들불처럼 번져간다. 경제파탄을 틈타 이념적 광기의 히틀러가 집권했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1939~45년)을 거치며 대공황에서 벗어난다.

1929년 대공황과 2020년 팬데믹 사태에서 공통되는 데이터가 있다. 둘 다 미국 상위 0.1% 부유층이 차지한 부가 34%였고, 근세사에서 가장 심한 빈부격차였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이 일면서, 2020년 세계경제포럼은 50년 전에 내세웠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다시 선언했다. 가치 창출과 공유에서 기업은 고용인·고객·공급자·지역사회·사회 전반을 대상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하며, 팬데믹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경제를 리스트럭쳐링하고 자본주의를 리폼해야 한다는 요지다.

2020년 팬데믹 대응의 봉쇄정책과 경기부양책은 공급사슬 와해와 국가부채 급증을 유발했다. 국가간, 계층간 빈부격차도 더 벌어지고 포퓰리즘 정책은 도를 넘었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37개 주요국 중 1위이고 국가 GDP를 앞섰다. 나라 안팎으로 사상 유례없는 퍼펙트 스톰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위기 탈출의 실마리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팬데믹 패닉 극복을 위한 국제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 유럽발 전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를 혼돈에 빠뜨렸다. 지구촌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