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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참여 모두 비판했던 한국문학의 우상파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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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전쟁소설 『25시』로 유명한 루마니아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의 내한 당시. 왼쪽이 이어령 선생. [중앙포토]

1974년 전쟁소설 『25시』로 유명한 루마니아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의 내한 당시. 왼쪽이 이어령 선생. [중앙포토]

 한국문학의 우상파괴자 – 비평가 이어령

이어령(李御寧)은 문학평론가라는 직함에 가둘 수가 없는 인물이다. 그의 현란한 달변과 박식은 나라 안에서 견줄 만한 이를 찾기 어렵다. 그는 평론을 하는 한편 소설과 희곡을 쓰고, 많은 베스트셀러를 생산한 에세이스트다. 1972년 월간문예지 문학사상을 창간해 한국 문학을 지탱하는 문학 잡지로 키워낸 인물도 그다. 그는 나라 안팎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학교수고, 한국 고전 문학의 연구자이며,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 · 폐회식을 세계적인 문화 이벤트로 만든 문화 기획자다. 정부에 문화부가 생겼을 때 초대 장관을 맡은 인물도 바로 그다. 어쨌거나 그의 문학 활동의 중심에는 비평 작업이 자리 잡고 있다.

이어령은 1933년 12월 29일 충청남도 아산군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다. 호적에는 그가 1934년 1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자마자 두 살을 한꺼번에 먹어야 하는 아들을 생각한 아버지의 배려에 따른 것이다. 의협심이 강하고 반항 의식이 있던 이어령은 열한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어린 나이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안겨준다.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뒷날 그의 의식 속에 하나의 원체험으로 자리 잡는다. 이어령은 온양국민학교와 부여고등학교를 거쳐 195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56년 이어령은 평론 '우상의 파괴'를 들고 문단에 나온다. 스물셋 젊은 나이의 그는 '우상의 파괴'에서 전후 한국 문단에 봉건적으로 군림하고 있던 ‘우상들의 파괴’를 선언한다. 그는 이 글에서 김동리를 ‘미몽(迷夢)의 우상’으로, 모더니즘의 기수를 자처하던 조향을 ‘사기사의 우상’으로, 이무영을 ‘우매(愚昧)의 우상’으로 몰아세운다. 나아가 그는 황순원 · 조연현 · 염상섭 · 서정주 등 당시에 문단을 주도하고 있던 대가들을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하게 비판한다. 기성 문단의 안이성과 공허한 대가 의식을 공격하는 그의 논리는 서구적 수사학으로 단련된 새로운 감각의 한글 문체로 뒷받침된다. 젊은 문학 평론가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와 '화전민 지역' '분노의 미학' '수인의 영가' 등은 우상을 깨부수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해머였다. 심지어 한국의 문학 평론은 그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문학’으로 격상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문학 지성의 눈에 패배주의와 은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고루한 기성들의 문학은 “대지가 아니라 허공에 뿌리를 뻗고 살아가는 슬픈 풍란(風蘭) 문학”이었다. 그는 ‘풍란 문학’을 청산하고 ‘대지의 문학’을 하자고 외친 것이다. 그는 “자기 상황에 대한 부재 증서를 쓰고 있는” 순수 문학론을 무서운 기세로 질타한다. 그러나 이어령이 주창한 참여 문학론은 60년대 이래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민족 문학론이나 문학의 사회 참여 노선과는 결부터 다르다. 그의 참여 문학론은 개인의 실존에 초점을 맞춘 “휴머니스트의 문학”이다.

1890년대 후반의 이어령 선생. 89년까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를 지내다 90년 초대 문화부장관에 취임했다. [중앙포토]

1890년대 후반의 이어령 선생. 89년까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를 지내다 90년 초대 문화부장관에 취임했다. [중앙포토]

63년 8월 12일부터 10월 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하잘것없는 단서에서 우리 문화와 의식의 실체를 찾아낸 그의 천부적인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이다. ‘이것이 한국이다’라는 부제가 딸린, 에세이의 진수를 보여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입체적이며 지성적인 한국론이다.

63년 현암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1년 동안 국내에서만 10만 부가 나가고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진기록을 세운다. 컬럼비아대학교 등에서 동양학 연구 자료로 쓰이기도 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일본 학계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켜 이 책을 읽은 후쿠오카 프로듀서에 의해 '봉선화'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며, 대만에서는 『기토기풍(欺士欺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된다. 40만 부가 넘게 팔려 나간 이 책의 인세로 이어령은 신당동에 집까지 마련한다.

68년에 들어 그는 김수영과 한바탕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은 이어령이 조선일보 67년 12월 28일 자에 투고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에서 촉발된다. 김수영과 몇 차례 부딪치며 그의 문학적 입지는 더욱 다져진다. 김수영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라는 글을 통해 이어령이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에서 펼친 논리에 반박하며 “오늘날의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의 소심증과 무능에서보다도 유상무상의 정치권력의 탄압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몰아친다. 그러자 이어령은 “문학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저울질하고 있는 오늘의 ‘오해된 사회 참여론자’들이 그런 것이다.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 자체로 감상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관의 문화 검열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최근 1, 2년 동안 김수영 씨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문학 비평가들은 참여라는 이름 밑에 문학 자체의 그 창조적 의미를 제거해버렸다. 그 대신 문학의 그 빈자리에 진보적 정치 사회의 이데올로기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들여앉히려 했던 것이다”라고 김수영을 비판하고 나선다. 두 사람 사이에 거듭 오간 반박과 재반박은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이 논쟁을 통해 이어령은 사회학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인간을 옹호하는 자신의 문학론이 당대의 진보적 현실 참여론과는 뚜렷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진보적 민중 문학론이 득세하며 큰 흐름을 이룬 70년대의 한국 비평계에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좀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그는 이에 따라 70년대부터는 문학 평론을 거의 쓰지 않고 “고독한 아웃사이더”로 남는다.

82년 그는 일본에서 1년 동안 머물며 연구 생활을 한 뒤 일본 문화를 일본어로 비판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내놓는다. 일본 사회에 이어령 신드롬을 일으킨 이 책은 한국과 일본에서 쇄를 거듭하며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이어령은 이처럼 문학 평론 외에도 소설, 희곡, 에세이, 문명 비판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텍스트를 생산한다. 태어날 때부터 본디의 ‘나’와 문서(호적)상의 ‘나’로 분열을 겪은 이어령은 바로 그것이 자신을 문학으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1968년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영화 '장군의수염'의 한장면. 원작소설 『장군의 수염』이 이어령 선생 작품이다. [중앙포토]

1968년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영화 '장군의수염'의 한장면. 원작소설 『장군의 수염』이 이어령 선생 작품이다. [중앙포토]

66년 그는 잡지 세대에 첫 장편 소설 『장군의 수염』을 발표한다. 『장군의 수염』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과 6·25 그리고 5·16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김철훈이라는 지식인을 비롯해 그 주변의 진실한 사람들이 부조리한 사회 상황에 어떻게 짓밟히고 희생되는지를 조명한 작품이다. 전위적이고 자의식적인 요소가 강한 이 작품은 사회 문제와 현대사를 곁들이며 존재의 문제에 깊이 천착,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페이소스를 짙게 깔고 있다. 이어령은 개인과 집단의 갈등, 혼돈스러운 사회 상황과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된 개인의 실존적인 고뇌를 이 소설에 담아낸다.
 『장군의 수염』은 구조와 주제 면에서 여느 소설들과 퍽 다르다. 이 작품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액자 형식을 곁들인 추리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러 결정적인 순간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장군의 수염’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무의식적이고 원시적인 힘, 권위적인 힘을 상징한다.
이어령은 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62년부터 66년까지 모교의 문리대 강사를 거쳐 67년부터 89년까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선다. 이 사이에 그는 서울신문·한국일보·경향신문·중앙일보·조선일보 등의 논설위원을 거치는 한편, 72년부터 87년까지 문학사상 주간을 맡는다. 79년 10월에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을 받은 그는 90년에 들어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한다. 문화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그는 장관 시절에 ‘문화 발전 10개년 계획’을 내놓지만 반응이 냉담해 뜻을 펴지 못한다. 추정 예산 3조 원이 넘는 이 계획은 ‘꿈꾸는 자의 타령’, ‘거품 정책’ 등의 논란을 빚으며, 그저 문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일 정도로 남고 만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문화의 세기’라며 허겁지겁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지금에 와서 돌아봐도 빈틈없고 앞선 느낌을 준다.
그동안 독자들을 사로잡는 빼어난 에세이와 작품 비평을 내놓곤 하던 이어령은 2000년에 들어 비로소 자신의 첫 번째 문학 이론서를 내놓는다. 청마 유치환의 시가 어떻게 안과 밖, 위와 아래 등 공간의 대립과 구조를 통해 다른 의미소(意味素)를 낳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지를 분석한 『공간의 기호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령은 기호론에 관심이 많아 동서 문화,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분석하고 ‘기호학회’까지 창립한다. 그의 강연은 엄청난 독서량과 날카로운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강연을 할 때 동서고금의 철학자나 문인들의 주옥같은 명구를 남다른 응용력과 상상력으로 걸러 엮어낸 다음 유행어까지 버무려 현실의 맥락과 의미를 꿰뚫는다. 이제는 글보다 말로 뭇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어령은 한 시대를 풍미한 비평가임에 틀림없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2009)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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