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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태화가 고발한다

아틀라스美, 움츠린 대가는 참혹했다...그럼에도 눈 감는 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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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화 국제관계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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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래픽=김영옥 기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래픽=김영옥 기자

미국의 사상가 아인 랜드는 경제적 번영을 책임지는 기업가들을 아틀라스에 비유했다. 아틀라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늘을 떠받치는 거인이다. 랜드는 그의 소설 『움츠린 아틀라스』 에서 정부의 시장개입으로 아틀라스가 움츠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해 보자고 한다. 말 그대로 하늘이 흔들리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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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질서의 아틀라스를 꼽자면 누구나 미국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국 패권’이라는 말은 미국의 지배를 뜻하므로 부정적 의미로도 쓰이기도 하지만, 그 패권은 결국 자유로운 교역과 항구적 평화라는 ‘하늘’을 떠받치기 위한 아틀라스의 힘과 같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령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령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지속적인 미국의 개입 축소 

하지만 미국이라는 아틀라스가 움츠릴 조짐이 곳곳에서 관측된다. 아인 랜드의 경고가 국제질서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위기가 나타난다. 아틀라스가 잠시 힘을 빼자, 아프가니스탄이 허망하게 함락됐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아틀라스에게 하늘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패권이 동유럽에서 절대적이지 않으며, 이 지역의 하늘은 러시아가 떠받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이 하늘을 떠받치겠다고 주장한다.

미국 내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2016년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 내 고립주의(국제사회에서의 개입 축소)의 원인이 아닌 증상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워싱턴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세금으로 다른 부자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고, 미국의 사활이 걸리지 않은 분쟁에 미군을 파견하는 것에 수긍하지 못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미군. [AF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미군. [AFP=연합뉴스]

미국 내 '고립주의 신드롬'은 좌우를 망라한다. 지난 2019년 조지 소로스(친민주당 성향)와 찰스 코크 재단(친공화당 성향)은 퀸시 연구소를 설립했다. 퀸시 연구소는 미국의 국제 개입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좌파 역사관, 타 강대국들과의 마찰이 기업들의 활동을 저해한다는 경제관을 표방한다. 막대한 재력을 지닌 퀸시 연구소는 미국이 '보호할 가치가 없는 동맹'과 '스스로를 보호할 여력이 있는 동맹'들에 대한 안보 공약을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이러한 기준들을 통과하는 동맹국들은 많지 않다.

많은 이들이 바이든의 당선을 미국의 국제무대 복귀로 여겼지만, 바이든 행정부 또한 고립주의의 늪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제이크 설리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2018년 '중산층을 위한 외교 정책'을 주창했다. 외교 엘리트들의 모험을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중산층의 이익을 외교 정책에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의 균형을 강조하지만 군사적 개입은 꺼린다. [AP=s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의 균형을 강조하지만 군사적 개입은 꺼린다. [AP=s뉴시스]

미국에선 국내 제조업 및 농업 종사자들의 생활과 직결된 무역 정책은 사실상 마비되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다니엘 스나이더는 "미국이 인도·태평양에서 다양한 외교적 시도를 하고 있지만 크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이 여전히 고립주의와 국제 리더십 사이에서 방황하는 양상을 보여준다"고 한탄했다. 스나이더는 2024년에 트럼프가 당선되면 주한미군 철수 혹은 최소한 감축을 시도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 진보·보수 모두 현실에 눈 감아   

미국은 현재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는 전략을 펼치며 인도·태평양 지역에 집중하고 있지만, 고립주의의 유혹은 여전히 강력하다. 또한, 중동과 유럽에서 분쟁이 벌어지면 워싱턴의 시선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인도·태평양에서 리더십을 완전히 포기할 가능성은 낮지만, 그 범위와 깊이는 불분명하다.

움츠리는 미국을 마주하는 우리의 대처는 어떠한가? 진보 진영은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보수 진영은 그저 미국이 영원히 한반도에 남기를 희망한다. 즉, 진보는 한국이 홀로 개인 플레이를 해도 팀워크가 유지될 것이라 생각하며, 보수는 별다른 노력없이 팀원이 떠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원한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초점은 남북대화와 제재 완화에 맞춰져 있으며, 모든 대외정책이 대북정책의 종속 변수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목도하면서까지 진행되지도 않은 남·북·러 가스관을 거론하며 한·러 협력을 강조하는 모습은 그저 부끄럽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한국 정부가 말하는 ‘당당한 중견국 외교’는 미국과 일본에 대항할 때만 발동하는 것인가?

지난해 12월 중국을 방문해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을 만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중국을 방문해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을 만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 [연합뉴스]

남북관계를 미·중 패권 경쟁에서 분리시켜 발전시킬 수 있다는 허상 또한 널리 퍼져있다. 미국은 그들이 철수 중이라는 중동에서조차 중국이 아랍에미리트(UAE)의 항구에 군사 시설을 건설하려 하자 정치적 자원을 총동원해 공사를 중단시켰다. 하물며 신냉전의 한복판인 동북아에서 미·중 경쟁을 제어할 수 있다는 발상은 나르시즘에 가깝다.

일본·독일 등은 기민하게 대응

주요 국가들의 행보는 다르다. 미국의 우방들은 맹목적인 친미 정책을 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존재감을 인도·태평양에 고정시키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 일본은 심지어 먼 유럽의 우크라이나 사태가 연료 부족으로 이어질 것에 대비해 유럽 국가들에 LNG를 지원했고, 본격적인 침공 후엔 대러 독자제재를 결정했다. 여러 지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미국에 대한 배려다. 주요 7개국(G7)은 대륙을 넘나들며 중국과 각을 세우는 리투아니아와 대만을 지원 사격하고 있다. 중국의 반자유주의적 행태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독일까지 아시아로 활동 반경을 넓힌다. 미국의 고립주의와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이중 소용돌이 속에서 각국이 국익과 가치를 기반으로 합종연횡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우리의 존재감은 없다. 19개국 100명이 넘는 의원들이 참가한 ‘대중국 의회간 연합체’에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아틀라스가 떠받들고 있는 하늘이 무너질 때 우리가 서게 될 위치를 생각해야 한다. 중국의 대내외적 한계를 고려할 때, 중국이 미국을 밀어내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중국이 하늘의 일부만 미국 대신 떠받들게 되더라도, 이웃 국가인 한국이 그 아래 위치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미국의 고립주의 세력들은 이 시나리오를 배제하지 않는다. 저서 『예정된 전쟁』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이 현실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지역 세력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중국이라는 새로운 아틀라스가 떠받치는 하늘 아래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주변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꾸준히 보이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중앙포토]

주변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꾸준히 보이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중앙포토]

한국은 자유냐, 아니냐 선택 기로에 

2019년 4월 랜디 슈라이버 당시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 차관보가 스탠퍼드대에 왔을 때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미국에게 안보,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국가들에게 양자택일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항행의 자유와 해군력이 횡포를 부리는 환경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움츠리는 미국'의 짐을 분담하길 거부한 유럽의 정치인들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홀로 유럽의 안보를 담당할 수 없었던 미국은 지난 수 년간 동맹국들에게 대러시아 에너지 의존 축소와 나토의 군사력 증강을 촉구했다. 이를 안일하게 무시했던 댓가가 지금 펼쳐지고 있다. 아틀라스와 함께 하늘을 떠받치지 않은 대가는 무너져 내리는 하늘과 러시아라는 아틀라스 아래에서 드리우는 먹구름이었다.

중국이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무기화하고 군사적 야욕을 계속 드러내면 미국은 동맹들에게 더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할 것이다. 자국 유권자들에게 국제 관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자연히 아틀라스의 친구인 우리도 선택의 기로 위에 선 셈이다. 아틀라스가 움츠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늘을 같이 떠받칠 것인가, 아니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만 볼 것인가?

[이재명의 별별시각]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합니다
[윤석열의 별별시각]전쟁을 막는 것은 말뿐인 종전선언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노정태 작가의 글, 그리고 홍태화씨(스탠퍼드대 국제관계 전공 학생)의 글과 함께 읽으면 좋을 여야 대선 후보의 입장을 올립니다. 각 후보가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린 포스팅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전문은 중앙일보 중앙일보 사이트(www.joongang.co.kr/series/11534) 노정태 칼럼, 홍태화 칼럼 하단에서 볼 수 있습니다.